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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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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06.15 15:10

명주잠자리

 

공원 긴 의자 아래에 깔때기 모양으로 흙이 패여 있다. 개미지옥이다. 개미지옥은 개미귀신이 파놓은 함정이다. 의자 밑엔 개미지옥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공원에서 개미지옥을 처음 본 뒤로는 공원 의자나 정자에 앉게 되면 으레 밑을 보게 된다. 개미귀신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 강가 모래밭이나 숲 속 산비탈 아래에서 볼 수 있지만 동네 공원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개미귀신은 명주잠자리 애벌레다. 그러니까 개미귀신이란 곤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명주잠자리 애벌레의 별명인 것이다. 명주잠자리는 잠자리와 생김새가 닮아서 잠자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잠자리와는 전혀 다른 무리에 속하는 곤충이다.

개미귀신 이름이야기를 해야겠다. 처음 명주잠자리를 알려주신 선생님은 명주잠자리 애벌레가 개미지옥이고 개미귀신은 딱정벌레 무리에 속하는 길앞잡이 애벌레 이름이라고 하셨다. 개미지옥이 개미귀신으로 이름이 바뀌고 개미지옥은 개미귀신의 함정이 된 것은 아마도 어떤 곤충학자가 백과사전에다가 (명주잠자리 애벌레를) 개미귀신이라고 잘못 기록한 뒤부터 이런 웃기는 일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이리라.” [<곤충의 사생활 엿보기>,김정환,당대]

개미귀신은 모래 위에서 재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흙 속으로 파고들면서 흙을 파내서 깔때기 모양의 함정을 만들고, 가운데 가장 깊은 곳 아래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벌레가 굴러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개미귀신은 이름처럼 개미만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개미지옥으로 떨어지는 다른 벌레들도 잡아먹는다. 벌레가 개미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면 개미귀신은 벌레가 도망가지 못하게 모래를 뿌려서 계속 깔때기 함정 안쪽으로 쓸려들게 한다. 큰 턱으로 벌레를 움켜잡으면 소화액을 내서 벌레의 체액을 빨아먹는다. 체액을 다 빨아먹고 난 벌레의 껍질은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런데 개미지옥으로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빠질까? 수십 개의 개미지옥 앞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본 적이 있는데 개미 한 마리 빠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이들과 함께 개미귀신이 벌레를 잡아먹는 것이 보고 싶어서 왕개미 한 마리를 잡아 개미지옥에다 넣어 주었다. 하지만 왕개미는 우리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개미지옥을 빠져나와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아주 작은 개미를 한 마리 넣어주었더니 개미귀신은 그걸 흙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결국 먹는 걸 보지 못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본 개미귀신은 개미지옥으로 굴러 떨어진 사냥감을 큰 턱으로 붙들고 체액을 빨아먹는 무서운 사냥꾼이었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깔때기 모양을 한 개미지옥을 꽃삽으로 떠내서 살살 헤쳐 본다. 개미귀신은 몸에 흙을 발라서 흙과 구별이 잘 안되지만 가만히 헤쳐 보면 뒷걸음질 치는 개미귀신을 찾을 수 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면 개미지옥에 빠진 벌레를 움켜잡는 무시무시한 큰 턱이 머리 앞쪽으로 집게처럼 나와 있다. 개미귀신의 다리관절은 앞으로 걷기 보다는 뒷걸음질 치기에 좋게 변해버렸다.

생태 잡지를 펴낸 출판인 조영권은 소심한 개미귀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소극적인 생각은 끝없는 소심함으로 진화해 간다. 어떤 절대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유리한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생물 세계의 진화다. 명주잠자리 애벌레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법은 굶어 죽더라도 작은 반경에 스스로를 가두어 안주하는 삶이다.” 개미귀신은 움직이지 않아 체력 소모가 적어서 오랜 시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그렇게 버텨도 먹이가 잡히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하는데 그냥 그대로 버티다 굶어 죽기도 한다.

날이 더워지는 이맘때쯤 개미지옥 속 개미귀신은 모래로 만든 경단 속에서 번데기가 된다. 한 달쯤 뒤에 경단을 뚫고 나와 날개돋이를 하고 날아오른다. 뒷걸음질밖에 못 치던 개미귀신은 이렇게 허물을 벗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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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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