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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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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고 각색된 68혁명의 기억 속

사회운동, 문화운동과 노학연대의 길을 묻는다

 

정용경사회운동국장

 



196856, 파리 시내에 또다시 바리케이트가 오른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대학생들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금지하기를 금지하라등의 구호를 내걸며 대학 정문을 걸어잠그고, 건물 외벽에 거대한 그림과 구호를 칠하고,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시가전을 벌인다. 513일부터 바리케이트는 공장으로 번진다. 프랑스 서부의 항공기공장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르노공장과 항공산업 노동자들이 파업하기에 이른다.

사실 당시 3대 노동조합들이었던 CGT, FO, CFDT 간부들은 14일을 끝으로 총파업을 종료하고 교섭을 적절히 마무리짓길 원했었다. 하지만 막상 터져나온 노동자들의 변혁적 열망은 제어할 수 없었다. 파리와 노르망디, 즉 프랑스 서북부의 제철소 공장 중에서는 점거된 곳이 점거되지 못한 곳보다 많아질 정도였다. 철도노동자들의 기차역 점거에 이어 보험사, 상가와 은행이나 인쇄업소까지도 일제히 파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의 22%에 달하는 1,100여만 명의 노동자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총파업을 벌였다.
드골 대통령 가족이 몰래 독일내 프랑스군부대로 피신했다. 프랑스 국정이 2주가량 마비되고, 정부 고위간부들은 문서를 소각하고, 정말로 이러다가 체제가 뒤집히는 것 아니냐는 불안과 희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3대 노조는 비밀리에 접촉해 온 정부관료 자크 시라크와 임금인상 협상을 체결하고 파업을 종결시켰다. 타협해버린 노조의 배반으로, 청년학생대중의 직접행동과 노동자들의 거센 파업은 하루아침에 폭삭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탄 드골은 삼색기를 흔드는 수만 명의 반동세력을 계획적으로 운집시킨 뒤 수구적 환호인파 속 귀국하고, 그 길로 프랑스 하원을 해산시켜 623일 비상 총선을 진행하며 권력을 되레 강화했다. 수구 반동의 승리로 일단락되는 듯 보이지만, 일 년 뒤 드골은 결국 물러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68의 정신자유와 청춘의 이름으로 적당히 상품화되어, 혁명의 주체들이 그토록 질색하던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5월 혁명’, 실은 1963년부터 이어진 노동자 파업의 빙산일각

한국에서는 흔히 학생주도의 5월 혁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68혁명. 전후 베이비부머들이 치기와 반항심과 넘치는 호르몬으로 마오와 체게바라나 적당히 인용하고, 미국 히피들 따라하면서 난교하고 떼쓰던 쯤의 일로 묘사되기도 한다. 현대 프랑스의 소비문화와 개인주의의 뿌리, 미국발 신자유주의 수입의 계기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혁명은 사실 5월에, 1968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에서, 심지어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1963, 한 달가량 지속되었던 전국각지의 광부들의 임금인상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3년 한 해에만 누적 파업일수가 5,990,150일이나 되었다. 1966517일에는 1967년에도 누적 파업일수가 총 4,500,000일이었다. 68년도 1, 결국 프랑스 서북부의 바스노르망디 캉 지역의 철강공업지대에서 제철소 노동자들의 집단 파업이 총파업의 첫 불씨를 당기며 68년도의 거세고 압축적인 불길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런 노동자들의 현장투쟁 기류를 짧게나마 증폭시키기까지, 노학연대와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이 임계치를 알리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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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GT 노조의 몽벨리야르 지회에서 68혁명을 기리기 위해 조합원들에게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열거한 포스터. “정부와의 성공적인 협상을 통해 14%의 임금인상과 공장 내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막을 내린 파업투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해방서사: ‘기폭제로서의 반자본 담론들
68년의 그 여름, 학생들은 자신들이 노동자계급의 편에 서서 전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례로, 상황주의자들의 경우를 살필 수 있다. 1957년 결성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인간 본성으로부터 유린시키는 과정에서, 당시 한창 보편화되던 텔레비젼 등 대중매체가 큰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탈정치화될 것을 반강요당하며 장식품인 매체를 수동적으로 구경하는 구경거리의 사회에서, 인간들은 무기력하고 잘못된 표상을 쫓는 존재로 전락해 이용당한다는 것이었다. 그 부르주아적 허구성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정치활동으로서의 선언적 예술을 추구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와 학생들이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 고취의 과정에서 전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68혁명은 일명 신좌파의 첫 등장을 알리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이 새로이 등장한 신좌파는 정치의 미학화가 곧 파시즘이라던 발터 벤야민의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정치가 미술관에 박제되고 소비유통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본주의라는 파시즘의 체계에 흡수되고 말았다. 보쟈르 건물의 실크스크린 제작소를 점거한 예술가 집단이었던 아뜰리에 포퓰레르는 수백장의 정치적 포스터들을 전부 익명으로 공동제작하면서, 이 정치적 선언들을 현장으로부터 괴리시키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2018년의 프랑스 파업, ‘68: 저들은 기념하고, 우리는 계승한다

하지만 올해 파리의 보쟈르에서 열린 전시에서는 아뜰리에 포퓰레르의 포스터들이 버젓이 전시되어 있었다. 올해 프랑스에서는 68혁명 50주년 기념사업이 유난히도 많았다. 피끓는 저항의 표상들이 얌전한 부르주아지의 향유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저들은 기념하고, 우리는 계승한다”. “1968-2018.” 5-6월 파리의 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플랑이었다. 52일부터 623일까지 각 노동조합들은 징검다리 파업을 하고 있다. 연이은 철도파업과 항공파업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파업 스케쥴을 조회하기 위한 어플들이 출시될 정도이다. FO는 과거의 과오를 스스로 극복하려 노력중인 것일까. 좌파 노조를 표방하는 CGT23일 이후에도 파업을 3일 더 연장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프랑스 반노조 정서의 뿌리는, 노조들이 계급과 역사를 배반하며 정부와 결탁했던 68혁명에 있기도 하다.

파업투쟁은 계속된다. cestlagreve.fr 사이트에는 현재 프랑스 전역에서 진행중인 모든 파업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대규모 파업이 3건 이하인 날은 5월에 단 하루도 없었다.

 

우리의 68, 16촛불혁명의 명멸하는 불빛

68년 여름, ‘노동자들이 드디어 국가를 해체했다라고 선언하던 청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되더니만 터무니없는 노동법 개악을 통과시켜, 혁명의 기억을 기어이 배신했다. 마크롱은 미테랑이 깔아 놓은 그 길을 충실히 잘 걷고 있다. 혁명을 팔아 당선된 미테랑의 행보도 지켜보며, 신뢰하기 힘든 노조의 눈치도 보아 가며, 뒤늦게 연쇄파업 투쟁에 나서야 하는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얼마나 착잡할까.

지금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개악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비슷할지 모른다. 문재인이 당선되는 모습을 보며, 촛불로 열렸던 광장이 포장되고 소비되는 그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느꼈던 그 허망함을 새삼 되새겨본다.
그럴싸한 타협의 함정 앞에서, 기만적인 미사여구들만 읊어서는 안된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과업을 묵묵히 지탱하며, 사회운동/노동운동/문화운동의 주체들과 청년학생대중이 역사의 교훈을 숙지하고, 전례없이 단단하게 단결해야 한다. 지금 여기가 우리의 68이다.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투철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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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뜰리에 포퓰레르의 저항 포스터들이 보쟈르의 68혁명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얌전히 전시된 모습.

“노동자, 학생, 대중: 가장 효과적인 연대” 라는 문구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장굴뚝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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