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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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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애초에 한 명의 인물을 그렇게 긴 시간 다룰 생각은 아니었다. 각자 다른 영역에서 고단한 활동을 하고 있는 네 사람의 노동운동가를 10여 분씩 옴니버스 형태로 다룰 생각이었다. 네 명에서 한 명으로 그렇게 기획이 틀어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있는다는 것은 그 인물과 함께 있어 즐겁고 감동하고 가슴 뛰는 행운과도 같은 시간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하고 행복하지 않고 끝내는 그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허무와도 같은 시간 또한 함께 찾아온다. 대부분,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이따금씩은 그렇다. 이 양면적 시간들이 순차적으로 왔다가 점차 뒤섞일 때쯤에 하나의 인물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누군가를 만나 알아가는 이 어려운 일을 우리는 <필승 주봉희>를 통해서 깨달았다. 단 한 명을 만나는 일도 우리에겐 과분했다. 결국 처음에 다루고자 했던 세 명의 인물에게는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단지 제작기획안 속에만 존재하고 말았다.

 

당대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의 상징

주봉희 위원장은 그때 이미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를 영상의 주인공으로 선정했을 무렵, 2~3년 전부터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이 시작됐으니 상당히 빠른 시간에 그는 무엇인가의 상징이 된 셈이다. 당시 비정규직 투쟁이 그랬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됐는데, 2003년이면 우리 사회의 주요한 노동자 투쟁은 대부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노동조합 건설을 둘러싼 노동기본권 투쟁이거나, 파견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만든 근로자파견법으로 일터에서 잘려나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맞선 파견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방송사 파견노동자였던 주봉희 위원장이 당대 투쟁의 상징이 된 데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도 있었지만 그의 개인적 매력도 한몫했다.

그는 풍모에서부터 사람을 이끄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의 외모는 당시 비정규직 투쟁이 갖고 있는 많은 이미지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누구든 그를 바라보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아주 단단하고 강인한 풍모였다. 이런 인상 깊은 풍모 때문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내면은 그보다 더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래서, 단지 그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비정규직 투쟁의 숨 막히도록 절박한 상황을 단 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와 작업 중에 그는 머리에 파견법 철폐글자를 색색으로 염색해서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을 상징하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연히 <필승 주봉희>에 등장하는 주봉희는 투쟁의 전사로만 존재하는 이는 아니었다. 곤곤한 일상의 삶들이 녹아있다. 비가 막 그친 듯 눅눅한 날씨가 온몸을 휘감는 날에 그가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장면으로 작품을 시작한 것도, 투사로서 그의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작업자의 의도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주봉희주봉희이게 작품에서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많은 모습들 중에서 투쟁하는 인간이 그것이었고, 어쩌면 작업을 진행할수록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더 몰아갔는지도 모른다. 내용 전개가 친절하지 않은데다가 작업자의 다른 작업에 비해 만듦새도 거칠었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주봉희와 함께 보냈을뿐더러, 처음으로 시도하는 인물다큐멘터리라는 작업에 대한 두려움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상당히 패기 있게 극복해냈다. 아마도 주봉희 위원장의 강인한 마음과 행동이 힘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여하간 이 작품은 영화진흥공사 제작기금을 처음으로 지원 받는다는 중압감을 그럭저럭 잘 넘긴 괜찮은 작품이 됐고, 노뉴단의 <해고자>, <인간의 시간>에 이어 개인작업이라고 이름 붙인 세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이기도 했다.

 

지지 않는 마음들이 포개지고 엮이다

<必勝 Ver 1.0 주봉희>, 다소 색달라 보이기도 하고 어렵게도 느껴지는 제목이다. 이 제목에는 무수히 깨지고 터지고 끌려나오는 패배 속에서도 일터와 투쟁의 현장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마음을 다해 지원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조만간 계속 만나겠다는 작업자의 패기가 담겨있었다. 이 영상은 단지 첫 만남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작업자의 그 패기는 오랜 시간 동안 다시 만나기 힘들었다.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게 된,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작업자의 인물 다큐멘터리를 다시 만났다. 그것은 이때의 패기보다는 훨씬 세련된 어떤 것이었다. 나는 주봉희때가 더 좋았다. 물론 나의 편견이지만.


* <必勝 Ver 1.0 주봉희> : 20034/57/노동자뉴스제작단-영화진흥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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