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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존엄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한국인 동지들의 연대가 새로운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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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2011년 혁명 이후 반혁명 군부정권의 박해와 탄압을 피해 난민신청을 해서 한국으로 온 이집트 난민 네 명이 자신들의 난민지위신청을 비롯한 모든 진정한 난민들의 난민지위 신청에 대한 공정하고 전문적이고 신속한 난민심사보장 촉구, 법무부의 조직적이고 관행적인 허위면접조서 날조에 대한 규탄과 책임자 처벌 및 심층조사 촉구, 모멸적 대우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 촉구, 이상 세 가지를 요구하며 28일 간의 단식투쟁을 이어갔다.

913, 국가인권위원장의 첫 공식 현장방문은 난민들의 단식농성장이었다. 이 날, 자이드씨는 자신과 자기 동지들의 단식이 모든 난민의 고통을 호소하기 위한 비명이었을 뿐 아니라, 역사의 질곡을 이겨낸 한국 민중에게 걸맞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의 행태를 고발하기 위한 비명이기도 했다고 인권위원장에게 이야기했다. 법무부를 압박해서 실질적인 제도개선을 추진할 예정이고, 난민 의제를 주요하게 생각한다는 인권위 측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들은 비로소 단식투쟁 해제를 결정했다. 바로 그 일요일, ‘난민과 함께하는 행동의 날집회에서, 자이드씨는 너무나 길었던 단식투쟁의 중단을 재차 선포하면서 법무부의 대대적인 허위조서작성에 대한 민관합동조사 착수의 필요성, 난민법 개악 저지 투쟁의 필요성, 예멘난민의 출도제한 해제의 시급함 등 당면 의제들이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확인했으며 더더욱 기나긴 앞으로의 제도개선 투쟁에 한국의 민중이 함께해 줄 것을 호소했다.

 


난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악용하는 보수 우익의 준동

근대 역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난민은 한국전쟁 당시의 600만 명의 피난민이었다. 이 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유엔의 난민 구호 기구였다. 이어 한국 정부는 1992년 국제난민협약을 비준하였지만,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질적인 난민 보호의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한국 난민신청자 4만여 명 중 면접이 정상절차에 맞추어 진행되는 경우는 2만여 건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인정률이 24%에 불과하다. 이 험난한 난민인정심사 과정에는 멸시, 편견, 공정하지 못한 절차, 법무부의 제도적 결함 등의 함정들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이 극소수의 난민신청자와 난민에 대해, 한국사회는 이제껏 한편으로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이질감을 이용하며 국민의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지배계급의 술수와, 다른 한편으로는 피억압자를 서로 불신하고 경쟁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지배계급의 모략 속에서, 난민들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난민들을 짓밟고 혐오하고 오해해 왔다.

자신의 노동권을 행사하며 일을 하는 난민은 일하러 왔다가짜 난민낙인을 감수하도록 내몰린다. 정작 자기 사회를 변혁하려는 투쟁주체로서 정치적 탄압을 받거나 신자유주의 질서가 야기한 전쟁을 피해 도주한 진짜 난민들은 법무부의 허위 공문서 날조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하는 한국인들의 혐오범죄와, 그런 혐오범죄들을 국민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정부의 비겁함 속에서, 죽음의 위기로 내몰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주체로 나서서 단식을 한 달이나 지속하고, 한국 시민사회가 난민의제를 중심으로 연대하게 하는 촉매제로서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내던진 이들의 결의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차례의 집회와 세 차례의 기자회견,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이어간 단식투쟁을 통해, 이들은 구조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배제되고 착취당하면서 매순간 강제송환과 죽음의 위협을 목전에 둔 채 살아가는 난민들의 보편적인 처지를 돌아보라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첫 만남과 인터뷰 진행

은행 냄새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하는 효자치안센터 앞 은행나무 밑동, 이집트의 민주화 투사 자이드 씨를 단식 12일차에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목숨을 건 탈주 끝에 도달한 한국, 식민지배와 독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이겨낸 이 나라라면 자신이 안주할 수 있는 곳일 줄 알았다. 방대한 증거자료를 넘기고 열 시간 넘는 인터뷰를 진행하며 난민지위를 신청한 뒤, 2년 넘도록 일도 제대로 못하는 체류지위로 기다렸다. 돌아온 것은, 증거와 인터뷰의 내용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않은, 한 문단도 채 되지 않고 오타가 난무한, ‘불허사유서였다.

단식을 함께하던 그의 지인 세 명 중 두 명은 난민신청자에게 허용되는 열악한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다쳤지만, 일회용품처럼 갈아끼우기 가장 쉬운 값싼 난민신청자의 노동을 사장이 책임질 리 만무했다. 의사는 이것이 산업재해였다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고, 근로복지공단에 조사를 신청하면 가짜 난민이라고 낙인찍힐까봐 그마저 못했다. 일할 수도 없고, 생계를 도무지 이어갈 방도가 없어 이들은 단식농성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법적 지위가 불안해서, 인터뷰 당일에는 아주 오랫동안 아주 천천히 많은 이야기를 풀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지금 이 지면에 담을 수는 없다. 필자 또한 8일의 동조단식을 결의하고 차츰 동지로서의 신뢰를 쌓아가면서 이들의 입장의 견고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범국제적 프롤레타리아의 연대가 무엇일지에 대한 상이 서로 조금씩 잡혀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Q 자이드님 안녕하세요. 이집트에서 시위 중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투옥과 살해의 위협을 받다가 탈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집트 본국에 계셨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어떤 과정을 거쳐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A 저의 법적 지위가 현재 불안한 상황이니, 알려드릴 수 있는만큼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카이로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의 끄나풀이었던 재판관을 규탄하는 시위 도중에 체포되었습니다. 구호를 평화롭게 외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거의 달아날 뻔했는데 친구가 잡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가서 저까지 순순히 체포되었지요. 그런데 경찰은 저를 체포하고 신분증을 보더니 아주 야비한 웃음을 짓더군요. 저희 어머니는 이집트인이지만, 아버지가 원래 팔레스타인 출신이셔서 저는 오랫동안 이집트 국적조차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차별적이고 친이스라엘적인 이집트 독재정권의 신분증 정책 때문이었는데요. 제가 팔레스타인 국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로 재판관들은 제가 무슬림형제단의 일원이라느니, 하마스의 사주를 받았다느니 온갖 억측을 늘어놓아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슈화시켜서 언론에 퍼뜨리고 저에 대한 각종 비방을 늘어놓더군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었어요. 사실 무슬림형제단은 테러 집단은 아니고,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에 저항한 단체들 중 가장 대중적인 이집트의 정당입니다만, 저는 굉장히 소수파인 사회주의자였고 이집트 국적자가 아니라서 정치활동에 제약도 있었던 등의 이유들로 무슬림형제단을 굳이 동지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여하간 이 일로 저는 8일간 유치장에 갇혔다가 임시로 풀려났지만, 5년형을 결국에 선고받았습니다. 이집트의 감옥은 한국과 달라서, 5평도 안 되는 공간에 수십 명이 우글우글 몰려앉아 제대로 앉지도 먹지도 못하고 고문을 당하다 죽어가는 그런 곳입니다. 저는 이미 얼굴도 알려져 있었고 도주해야만 했습니다. 이집트의 법정시스템은 전산화되어 있지 않아, 수기로 판결이 기록되면 출국정지 등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한 달 남짓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저는 친구를 통해 무사증 입국이 가능한 아무 나라로나 표를 구했고, 목숨을 걸고 도망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에는 빠져나왔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앞서, 그저 침통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겨우 살아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Q 한국으로 와서 난민 인정 신청을 하고, 그 후 25개월을 기다리면서 출입국관리사무소와 법무부를 상대로 난민불인정결정에 대한 이의신청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난민심사 면담에서 위조까지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한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어떤 것들이 가장 힘들었나요

A 힘들다는 것은 상대적인 이야기일 것입니다. 혁명 당시 눈 앞에서 15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총에 맞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쓰러지길래 달려가서 부축해 일으켰는데 손이 축축해서 보니 소년의 뇌와 피가 저의 손에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의 뇌를 손에 잡아본 적 있나요? 저는 저보다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저의 친한 동지가 살상되는 것도 목도했습니다. 제 그룹의 동지들만 수십 명은 경찰과 군부의 총격에 살해당했고 말입니다. 이집트에서 겪은 그런 일들로 감정이 다 피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너무나 힘들고 화가 나서 마침내 단식투쟁을 결의하게 된 일이 결정적으로 있었습니다. 한국 난민과가 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을 한 것입니다. 난민신청절차를 밟는 동안 조사관은 저의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서 자꾸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저는 정치적이고 법적인 이야기 위주로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받은 정치적이고 법적인 박해와 본국에서 했던 활동의 구체정황과 자료를 모두 무시한 불허사유서에는, 이집트에서 수배 중에 어떻게 여권을 정상적으로 발급받고 출국을 할 수 있었느냐는 둥, 제가 상세히 설명한 이집트 법집행의 특수성들을 모두 무시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와 함께 한국에 왔다가 저를 버리고 떠난 저의 전처가 러시아인이었다는 이유로 제가 사기결혼을 한 것처럼 기재되어 있었고, 저희 아버지의 국적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글들이 기재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이유들을 꼽아가며 제가 가짜 난민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것입니다. 저에게 이혼의 상처는 굉장히 깊이 남아 있었는데, 그런 저에게 제가 사기결혼을 했다는 혐의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모멸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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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번에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 투쟁에 돌입하시게 된 이유를 알려주세요

A 고국에서도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으로서 저는 정상적인 법적 절차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잃었을 때,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유로 거절당했을 때,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조작이나 허위나 차별 없이, 그저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보다 나은 절차를 요구하기 위해, 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G1비자(난민신청자의 체류만 가능한 비자)로는 제대로 된 안정적인 직업과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저희에게 단순노동으로 분류되지 않은 모든 노동은 불법입니다. 파트타임으로밖에 일할 수 없고 그마저도 일주일에 23일 이상 일하면 불법입니다. 3개월에 한 번씩 출입국사무소에 사장의 승인 하에 재계약을 해야 하고요. 이런 삶은 삶이 아닙니다. 저는 안정적인 최소한의 삶을 살기 위한 절박함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Q 이번에 출산한 아나스 씨와 부부, 한국에 계신 다른 난민 동지분들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A 아나스와 제이납의 아기가 최근에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무아타심, 아랍어로 투쟁이라는 뜻인데, 부모가 난민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난민신청자라서 사실상 출생신고를 못하는 무국적자입니다. 이처럼 난민지위조차 인정받지 못한 난민신청자 2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나스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높은 곳에서 추락해 산업재해를 입었지만 산업재해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는 등의 약점을 이용해서 의사소견서도 조작하고, 제도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악용하여 당연히 보장해야 하는 우리의 기본 권리조차 쓰레기 취급하는 것입니다. 아나스도 본국에서 경찰의 고문 등에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오다가 도주했는데, 여권발급을 어떻게 받았냐는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불허사유들이 열거되어 불인정 판정에 이의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나와 왈리드는 일 년이 넘도록 첫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전히 첫 면접 날짜조차 전해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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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이드 님이 생각하셨을 때 '연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한국에서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인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한국에 와서 가장 비참했던 것은,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식농성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와서 가장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 계속 머물고자 하느냐, 정떨어져서 떠날 생각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을 좋아합니다. 한국이 나아질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위 관료들과 지배계급, 사고가 굳은 세대들은 한국의 민중과, 변화를 추동하며 열려 있는 새로운 세대와 또 다릅니다. 그것을 저는 확인했습니다. 저는 연대라는 단어의 의미를, 한국에서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인 동지들로부터 새로이 깨달으며 희망을 얻었습니다. 제가 거리를 떠도는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이 아니고, 한낱 멍청이나 이방인이 아니라, 같은 이상과 이념을 지니고 함께 공유하며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셔서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인터뷰=정용경사회운동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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