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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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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10.16 10:34

늦털매미

 

걷기 좋은 때다. 이맘때는 어디를 걸어도 좋다. 마을 가까운 숲길을 걷다가 가끔 숲언저리 골목길을 에돌아가면서 걸었다. 이렇게 걷다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참 많다. 담을 없앤 어느 집 마당에서 깊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함박꽃나무를 보았고, 잎사귀에 붙은 광대노린재의 반짝이는 등딱지를 보았다.

골목을 돌아 숲길로 접어드니 벌레소리가 들린다. ‘-익 씩씩씩씩 씨-이 씨-이 씨--’ 느릿느릿 걷는 우리 걸음을 닮은 늦털매미다. 늦털매미는 여름이 다 가고 다른 매미들이 사라질 때쯤 나타난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찬바람이 불 때쯤 느릿느릿 나타나는 늦깎이 매미라서 이름조차 늦털매미로 불린다. 늦털매미 소리는 도시 숲이나 공원에서 가을 내내 들을 수 있지만 그 소리가 매미 소리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늦털매미 소리가 한여름 힘차게 울어대는 다른 매미들처럼 크지 않은데다 사람들이 매미는 여름에 잠깐 나와서 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늦털매미 소리는 매미보다는 풀벌레소리 같아서 가을에 잘 어울린다. 아마도 늦털매미가 여름에 나왔더라면 관악기로 이루어진 군악대 취주 소리처럼 우렁찬 말매미, 참매미, 쓰름매미, 애매미소리에 묻혀 짝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게다.

늦털매미소리는 숲속 가득 울려 퍼지는데 그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늦털매미는 높은 가지에 않아 짝을 부르고, 짝짓기하고 그 가지에 알을 낳는다. 나무 아래로는 잘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보기가 힘들다. 게다가 나무에 앉아있으면 머리와 가슴은 나무에 돋은 이끼 같고 날개는 나무껍질과 닮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늦털매미는 왜 가을에 나타나는지 내 멋대로 생각해 본다. 늦털매미는 참매미, 말매미 따위에 뒤지지 않는 크고 독특한 소리를 내어 그들과 겨루기보다는 매미 소리가 사라진 철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참매미, 말매미가 나타나기 전인 초여름은 이미 늦털매미를 꼭 빼닮은 털매미가 차지해서 결국 늦털매미는 밀리고 밀려서 매미가 다 사라진 가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늦털매미와 털매미는 크기나 생김새가 꼭 닮았다. 하지만 두 매미는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다. 털매미는 6월 초에 나타나서 늦털매미가 나타나는 8월 말쯤에 사라진다. 늦털매미는 털매미가 사라지는 8월 말쯤 나타나서 10월 말쯤 사라진다. 여름을 피하고 나니 가을숲은 온통 늦털매미 세상이다.

매미는 천적이 사라진 도시에서 그 수가 점점 불어나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때로 울어대서 소음공해를 일으키고, 나무줄기에 따닥따닥 붙어서 주둥이를 박고 나무즙을 빨아 나무가 자라는 기세를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있다. 요즘 말벌이 도시에서 수가 불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매미라는 먹이가 있기 때문이다. 말벌이 매미의 천적으로 등장했지만 말벌은 또 다른 문제가 되고 있다.

늦털매미는 서리가 내리기 전 짝짓기를 하고 참나무 가지에 알을 낳는다. 늦털매미가 붙어서 울어대는 참나무 밑둥치엔 참나무 시들음병을 옮기는 광릉긴나무좀 방재를 위해 노란색 끈끈이 트랩이 둘러싸여 있다. 거기엔 대개 광릉긴나무좀이 아닌 온갖 다른 벌레들이 새까맣게 붙어있다. 단지 광릉긴나무좀을 잡겠다고 수백 가지 종류의 작은 벌과 파리, 노린재, 딱정벌레, 나방을 죽이는 것이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산간 다 태우는 꼴이다. 벌써 여러 해 동안 방재를 해 와서 참나무 시들음병이 많이 누그러졌는데도 계속 이런 무모한 방재를 하는 것은 광릉긴나무좀의 씨를 말리려는 것일까? 숲 생태계에서는 광릉긴나무좀조차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그물코일텐데 말이다.

숲길과 골목길을 걸으며 많은 것을 보고 생각했다. 바스크 지방의 어느 고등학교 철학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걸을 때 각자에게 느리게 주어지는 현실의 단편은 무한한 차원을 드러낸다. 굽이굽이 숨어있던 부분들이 드러남으로써 절대 싫증나지 않는, 감각을 위한 보물을 선사한다. 오직 느림만이 우리를 세상에 헤아릴 수 없는 매력 속으로 무한히 풍부하고 재미있는 자연의 틈새로 이끈다.”[걷기의 철학/크리스토프 라무르/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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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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