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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그 아침풍경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그러니까, 영상 제작은 생각할수록 힘든 일이다. ‘이런 내용으로, 얼마에, 언제까지, 하는 거예요라고 서로 찰떡같이 약속을 하고 나면, 뒤에 서로 다른 능력과 테크닉을 요구하는 일이 크게는 3가지 정도가 기다리고 있다. 대본과 촬영과 편집. 굉장히 서로 다른 일이고 서로 다른 능력이 요구되지만, 우리는 때때로 이 3가지 일을 소위 ‘1인 올 프레이어all player라는 미사여구를 써 내려가면서, 한 명의 연출자에게 고스란히 맡겼다. 문제는 그 일에 시간제한을 뒀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때문에 우리의 제작 과정이라는 것은 일을 출발해서 가다가 조금만 삐끗하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일이 생기는 구조를 처음부터 만들어놓고 시작한다. 이런 구조의 한 가운데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감당해야 하는 연출자의 긴장감을 생각해보면 잔인한 짓이었다. 말하자면, 산별로 뭉쳐야 한다는 노동운동의 조직적 과제가 현실화되기 시작한 때에 만들었던 <공공산별, 또 다른 미래의 시작>도 이런 잔인한 일들 중 하나였다.

 

주춧돌이 튼튼해야 좋은 집을 만들 수 있듯

어느 날 아침. 사무실이 낙성대역 인근 4층에 있을 때이다. 상쾌한 기분으로 커피를 홀짝거리며 사무실 문을 여니, 이미 밤샘 작업을 한 친구가 있었다. <공공산별...> 연출을 하는 친구였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대본 작업을 하고 있었고, 최근에는 막바지 대본 작업을 위해 사무실에서 밤샘을 하고 있었다. 작업대 앞에 앉아있는 연출자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작업실 바닥은 도둑이 왔다 간 것처럼 엉망이었다. 방바닥에는 온갖 문서자료들과 책들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방바닥에 자료들을 힘껏 던지지 않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밤샘 작업을 한 친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제 막 울음을 그친 것 같은 모습이었다. 10년이 넘게 함께 일해왔지만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걱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의외로 솔직담백한 그녀의 입을 통해 다른 친구들이 사무실에 출근하기 전, 짧은 시간 동안에, 상황을 알게 됐다.

상황의 시작은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이라는 노동운동 내 조직 과제가 현실화하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한계나 산별 건설 과정을 놓고 대립되는 입장들이 비등하게 존재하는 데에 있었다. 조직 건설 과정의 현실적 어려움이 조직 건설의 정당성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 어려움에 대한 근본 원인이 서로 대립적인 입장으로 팽팽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대중을 한 곳을 바라보게 하고 한 곳에 모이게 하기 위한 교육선전영상 대본을 쓰는 데에 치명적인 약점이다. 대본이라는 것이 작업을 의뢰한 쪽의 논리와 행위의 정당성을 기반으로 해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것이 든든하지 못하고 약하다는 것이다. 주춧돌이 놓아지지가 않으니 그 위에 기둥을 세워도 자꾸 무너지게 된다. <공공산별..> 대본 작업은 이런 문제를 온전히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문제를 안고 출발한 대본 작업은 써도 써도 자가 안 써진다. 기초가 약하니 논리가 약하고, 약하니까 자꾸 무너지고, 무너져서 다른 것을 세워봐도 그 또한 약해서 무너진다. 이쯤 되면 대본 작업자는 초죽음이 된다.

 

1인 제작 시스템의 고단함

이런 식으로 <공공산별..> 연출자는 시달리고 있었다. 지치고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 지 오래됐다. 이를 돌파하려고 아무리 이 자료를 보고, 저 책을 봐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서 조언을 들어도, 풀리지 않는다. 점점 한계 상황에 다다르는데, 제작 완료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이제는 초초해져서 잠도 못 잔다. 자도 꿈속에서 가위에 눌린다. 그래도 막힌 대본을 해결할 단서를 찾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슬슬 치민다. 처음에는 겸손하게,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분노하고, 그 시간도 지나면 이 어려운 것을 혼자 감당하는 부당한 외로움에, 제작기한 함께 약속해 놓고 그것을 엄수해야 하는 냉정한 상황에, 복잡다단하게 쌓이고, 그렇게 쌓여가다가 결국 폭발한다. 그날의 아침 풍경은 그런 것이였다.

위기는 극복했다. 함께 어렵게 어렵게 대본 과정을 돌파해냈다. 대본 과정에서 간신히 빠져나오자 다가오는 제작완료 시간 때문에 그 친구는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촬영과 편집 작업에 돌입했다. 이미 대본 작업으로 기운을 한 차례 빼 지쳐있음에도 훌훌 털고 일어나, 체력이 더 필요한 편집 작업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대본을 완성했다는 안도감으로. 자신의 영상을 기다리고 있을 노동자 대중을 만날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이런 과정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친구에게 반복됐던 일이었다. 그날의 그 아침풍경은 그 친구에게 노뉴단이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아픈 풍경이다.

 

* <공공산별, 또 다른 미래의 시작 더 넓게, 더 강하게, 더 높게>: 20056/44/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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