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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12.15 06:29

버즘나무방패벌레

 


아파트 단지 사이 자투리 땅에 만든 쌈지 공원을 지나다 양버즘나무 낙엽을 주웠다. 양버즘나무 커다란 잎사귀는 바짝 말랐지만 물에 담가 불리면 막 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마냥 부드러워져서 나뭇잎 가면이나 나뭇잎 모자를 만들며 놀 수 있다. 양버즘나무는 도시 가로수로 심기에 알맞은 나무다. 양버즘나무는 공해와 추위에 강하고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 가지를 다 쳐내도 다시 쑥쑥 잘 자란다. 공기정화 능력도 좋고 잎이 커서 여름엔 그늘을 만들고 잎이 지면 치우기 좋다. 그런 양버즘나무도 흠이 있다. 잘 자라는 게 오히려 흠이다. 너무 빨리 자라, 거리의 간판을 가리고 보도블록을 들뜨게 하고 가지치기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벌레가 많이 꼬이는 것도 큰 흠이다.

양버즘나무에 먼저 꼬인 벌레는 미국흰불나방이다. 중학교 때 아이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학교운동장 가장자리에 줄지어 심어놓은 양버즘나무 그늘엔 잘 가지 않았다. 나무를 가득 뒤덮은 털북숭이 미국흰불나방 애벌레가 머리며 어깨로 툭툭 떨어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80년대 극성을 떨던 미국흰불나방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자 1995년 버즘나무방패벌레가 찾아들었다. 양버즘나무와 미국흰불나방, 버즘나무방패벌레는 모두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양버즘나무가 먼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뒤따라 들어온 미국흰불나방이나 버즘나무방패벌레는 쉽게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버즘나무방패벌레는 양버즘나무 가로수를 따라 전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양버즘나무는 병충해에도 강하다. 미국흰불나방 피해에도 견뎌냈고 버즘나무방패벌레 피해도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다. 양버즘나무는 병충해를 잘 견뎌냈지만 미국흰불나방에 이어 버즘나무방패벌레가 번지면서 사람들은 양버즘나무를 벌레가 많이 끓는 나무라며 꺼리게 되었다. 한때 가로수로 가장 많이 심는 나무였지만 가로수 목록에서 은행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이팝나무, 메타세쿼이아 따위 나무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양버즘나무 낙엽을 몇 장 주워보니 잎 뒤에 버즘나무방패벌레의 배설물과 허물이 잔뜩 묻어있다. 버즘나무방패벌레는 애벌레, 어른벌레 모두 잎사귀에 주둥이를 찔러 넣고 즙을 빨아먹는데, 피해를 입은 잎사귀는 잎 뒷면은 까만 똥과 누런 허물로 덮이고 잎 앞면은 허옇게 변하면서 일찍 떨어지고 만다. 그래도 잎살을 싹 갉아먹고 잎맥만 앙상하게 남기는 미국흰불나방보다는 그 피해가 덜하다.

버즘나무방패벌레는 어른으로 겨울을 난다. 양버즘나무 줄기에 너덜너덜 붙어있는 나무껍질을 떼어보면 껍질 안에 붙어서 겨울을 나는 버즘나무방패벌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무껍질에 붙어있는 버즘나무방패벌레를 루페(볼록렌즈를 사용한 작업용 확대경)로 들여다보았다. 버즘나무방패벌레를 잘 보면 왜 방패벌레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몸을 덮은 평평한 가슴 등판과 날개가 방패처럼 보인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니까 방패보다는 흰 색 투구와 방패를 둘러쓴 것 같다. 중세기사의 무거운 갑옷이 아니라 SF영화에서 나오는 미래의 전사 모습 같아 보인다.

양버즘나무 나무껍질 틈새는 버즘나무방패벌레만의 겨울 별장이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온갖 벌레들이 나무껍질 틈새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다른 철에 만났으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혔을 벌레들, 중국연두개거미, 금새우개거미, 깡충거미류, 풀잠자리애벌레와 응애, 진딧물, 매미충 따위가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겨울을 나고 있다. 나무껍질 안을 들여다보면, 예전에는 짚을 엮어서 나무줄기에 둘러 겨울을 나려는 벌레들을 꼬이게 해서 이른 봄 그 짚을 거두어 불태워서 해충을 방제했던 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해충보다는 해충의 천적인 거미나 포식곤충을 더 많이 죽이게 되어 해충 방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예산만 낭비하게 되는 꼴이었다. 커다란 양버즘나무 한 그루엔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겨울을 나고 있을까? 수백 아니 수천 마리쯤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양버즘나무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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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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