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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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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서 울다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어느 날, 회사의 손해배상으로 파괴되어가는 가족의 삶을 위해 어쩔 수없이 회사를 떠나는, 노조를 떠나는, 투쟁 중인 동료 곁을 떠나는, 그를 붙잡고 노조위원장이 말한다. “너만 힘든 것 아니야. 나도 오랫동안 힘들었고 지금도 너무 힘들어.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해보자. 내가 네 옆에서 이렇게 투쟁하잖아. 우리 조합원들 불쌍하지도 않냐? 어떻게 만든 노동조합인데.” 그러나 그는 위원장을 향해 같은 말만 반복한다. “저는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그날, 끝내 위원장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 가는 내내 그는 생각한다. 끝까지 당당하고 의연하게 자신을 만류한, 자신감과 자존감 강한 위원장이 혼자 사는 집에 들어서는 그 순간 그는 울 것이다.” 그 날로부터 1년 여 후에, 동료를 떠나보내고 혼자 집에서 울었을 그 위원장은 위암 말기로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가 그렇게 떠나고 난 후 1년 후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정종태>이다.

 

처절했던 투쟁의 시간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8년여간 취직도 해보고 작은 회사도 만들어 운영해보기도 했으나 전부 잘 안 됐다. 그가 재능교육에 학습지 교사로 취직할 때는 수중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였다. 당시 학습지 시장은 아이엠에프 직후여서 싼 과외비로 아이들 수업을 할 수 있어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한 해 신입사원 채용 규모가 만 명 가까이 되던 때였다. 회사는 호황이었지만, 노동자는 지옥이었다. 평균 10시간 노동에 120만 원 정도의 월급이었는데, 그마저도 특수고용관계이라 담당 아이들이 그만 두면, 그 아이 부모가 내야 하는 돈을 교사가 대신 내는 방식이어서, 종종 월급이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는 괴이한 노동조건이었다. 어찌 보면 해고는 당연했다. 정규직노조의 파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회사는 9명의 교사를 해고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특수고용노동자 최초로 노동조합을 결성한다(19991229). 결성한 바로 그날 노조는 해고자 원직복직, 위탁계약 철회, 독소조항 철회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한다. 한 달 만에 몇천 명의 교사들이 폭발적으로 노조에 가입한다. 그가 입사한 지 10개월만의 일이다.

처음에는 앞에서 고생하는 노조 간부들하고 술이나 마셔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2년여 뒤에 그는 3기 재능교육노동조합 위원장이 된다. 단체협약 갱신과 해고자 복직 등이 우선 과제였으나, 회사는 고의적으로 단협을 회피했다. 회사는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노조 죽이기에 나섰다. 조합원들의 조합 탈퇴를 강요했고, 노조 간부들에게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상황이 이러니 그가 위원장 임기를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2년여간 단 하루도 투쟁이 없는 날이 없었다. 삭발, 단식, 대국민 선전전 등 파업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매일매일 투쟁했다. 단사의 투쟁만으로 안 되겠기에 연대조직인 특수고용대책회의를 만들어 의장을 했고, 더 나아가 전국적인 비정규직 연대조직 건설에 앞장선다. 그렇게 몸부림 쳤으나 회사는 요지부동이었고, 조합원들은 점점 떨어져 나갔다. 그가 위원장으로 1년을 넘길 때는 조합원의 반이 줄었고, 위원장 자리에서 내려 올 때는 2/3가 줄어 있었다.

 

가난하고 고달팠던 삶

그는 깊은 죄책감에 시달린 채 현장의 학습지 교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다시 대의원으로 열심히 활동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매사 긍정적이고 의욕적으로 동료를 대했다. 때문에 그가 다시 학습지 교사로 월급 20만 원의 50%를 압류당하고 죽기 전까지 9개월간 10여만 원으로 어렵게 생활을 한 것을 가까운 지인들도 잘 몰랐다. 9개월간 늘 배를 곯았던 그가 너무 허기진 나머지 좁은 방을 샅샅이 뒤져 서랍에서 작은 돼지저금통을 발견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안에서 만몇천 원을 꺼내, 라면과 부탄가스를 사서 하루에 라면 반 개씩을 끓여 먹고 지냈다는 사실도 중학교 깨복쟁이 친구 말고는 몰랐다.

그가 병원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위암 말기로 손을 써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놀란 가슴을 안고 급히 병상을 찾아 온 동료들을 오히려 웃으며 위로하던 그는 이내 떠나고 말았다. “아쉬움은 단사 일을 제대로 못한 거죠. 동지들 만나고 싶죠. 나가면 편안하고 소박한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일들부터 찾을 것 같아요.” 그가 떠나기 며칠 전 병상에서 그와 한 마지막 인터뷰다. 위원장이었던 2년여 시간에 대한 책임감과 그것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2년여 시간 내내 그가 받았던 온갖 모멸과 깊은 마음의 상처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어떤 것이었다. 분명 그는 노조 활동을 위해 특수고용노동자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 곁을 떠날 즈음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투철한, 그러나 가진 것 하나 없는 활동가로 있었다.

 

* <정종태>: 50/2006/정종태추모사업회-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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