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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지니스트*를 추모하는 

우리의 자세


송준호┃기관지위원회



한세대 넘게 하이패션(High Fashion)** 산업을 이끌어온 명품 브랜드 펜디(FENDI)와 샤넬(CHANEL)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지난 2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미국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 헐리우드 배우 앤 해서웨이, 유명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 등 각계각층이 그의 죽음을 기렸고, 국내에서도 가수 지드래곤, 배우 송혜교, 모델 한혜진 등 문화예술계 유명인사들이 이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에서 영향을 끼친 그가 세상에 남긴 명암은 낮과 밤처럼 뚜렷이 갈린다.



도태하는 20세기 공룡

1950년대부터 시작한 칼 라거펠트의 경력은 화려하다. 이미 유수의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끈 그는 1982년 샤넬에 예술감독으로 영입됐다. 고급 브랜드 샤넬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통을 당대 거리문화와 섞은 라거펠트의 혁신성은 샤넬의 이미지를 단숨에 변화시켰다.


그러나 라거펠트의 견고한 명성은 그가 경력을 쌓는 내내 생산하고 유통한 비뚤어진 코르셋에 기반하고 있다. 일평생 마른 모델을 선호하며 스스로도 40kg에 달하는 체중감량을 한 바 있던 그는 ‘마른 모델 퇴출 운동’이 한창이던 2009년에도 막말을 쏟아내 대중의 비판을 한 몸에 받았다. 독일 잡지 <포쿠스(Focus)>, <브리기테(Brigitte)>와의 인터뷰에서 “마른 모델을 욕하는 여성들은 텔레비전 앞에 널브러져 감자칩이나 씹어대는 뚱뚱한 여자들뿐”이라 비난하고, “사람들은 ‘뚱뚱한 미라’들을 싫어할 뿐”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구시대성을 요약한다. 이른바 팻 포빅(Fat-Phobic, 비만 혐오) 또는 팻 셰이밍(Fat-Shaming, 비만 비하)이라는 용어로 관철된 그의 행보는, 마네킹처럼 규격화된 외모를 벗어난 여성에 대한 조롱과 혐오로 문화적 영향력과 권력을 확대재생산하며 하나의 제국을 만들었다.



소비, 공포에 의한 훈육

자본주의 소비시장 최전선에 위치한 패션산업 종사자들은 샤넬 제국을 재건한 황제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순종했다. 그들에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행이란,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었다. 사그라지지 않는 구매 욕구를 유발하는 것이야말로 하이패션, 매스패션(Mass Fashion)*** 할 것 없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이를 위해 획일적 아름다움과 함께, 이상적 목표로 제시할 규범적 아름다움의 기준을 만들었다. 패션업계는 유행의 빠른 순환과 도태에 대한 공포로 소비자를 훈육해왔다.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해, 패스트 패션(Fast Fasion)****의 등장 이후 매주 새로운 디자인으로 낮은 품질의 옷을 대량생산하고 소비 주기를 앞당기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 됐다. 스웨덴의 바스테라스 발전소에서 11개월간 약 15톤의 폐기 의류를 태워 연료로 사용한 일은 무척 상징적이다. 연료로 사용한 폐기 의류는 모두 H&M 같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 제품이었다. 대차대조표의 손실 목록을 줄이려는 패션 업계 자본가들의 이윤추구가 만든 소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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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샤넬의 봄·여름 컬렉션 피날레. 사진: YouTube 'FF Channel' 화면 캡쳐]



패션이 된 페미니즘

한편 2018년 4월 프랑스 패션지 <누메로(Numero)>와의 인터뷰에서 라거펠트는 “미투 운동이 지긋지긋하다”며 성추행 혐의가 드러난 스타일리스트 칼 템플러를 “불쌍하다”고 옹호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바지를 내리는 게 싫다면 모델이 되지 마라, 수녀원에나 들어가라”는 조롱 섞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가 2015년 샤넬의 봄/여름 컬렉션 피날레에서 페미니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모델들의 시위를 연출한 사실은 일견 모순적이다. 그러나 미투 운동을 비난했던 문제의 발언 이후, 그날의 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진정한 미소지니스트인 그가 페미니즘을 패션 그 자체로 소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만든 획일적인 ‘0 사이즈의 질서’는 그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마른 모델 퇴출’, ‘플러스 사이즈 모델 기용’ 등의 움직임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쇼는 그의 기만과 몰락을 동시에 보여준 암시였던 셈이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미소지니스트의 삶과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공과를 나누는 기억법은 대체로 공으로 과를 덮으려 할 때 유효하다. 어떠한 예술적 성취도 사람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을 짓밟는 예술은 무가치한 자기부정이다. 도태의 미학이야말로 철 지난 혐오를 기리는 자세일 것이다.



* 미소지니(misogyny)는 ‘싫어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misein’과 ‘여성’을 뜻하는 ‘gyne’을 결합한 말로, 직역하면 ‘여성 혐오’.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제2의 성으로 인식해 대상화하는 모든 언어와 행동을 뜻함.

** 소수 고객을 위한 맞춤복. 예술적이고 작품성 있는 디자인, 고급 소재를 사용한 고급패션을 말함.

*** 다수 대중을 위한 기성복.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중적 패션을 가리킴.

**** 패스트푸드처럼 저가의 짧은 주기로 대량생산·판매하는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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