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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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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1.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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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金在鳳 

1891~1944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1925년 4월 18일 저녁 무렵, 서울 종로구 가회동 김찬의 집에 7명의 사내가 극비리에 회합했다. 이 모임의 정식명칭은 조선공산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 참석자는 김재봉, 김약수, 김찬, 유진희, 조동호, 주종건, 정운해였다.


그들은 하루 전날 일경의 감시망을 조선기자대회와 조선민중운동자대회로 쏠리게 만들어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당 대회에서는 당 명칭과 당 간부를 인선할 3명의 전형위원을 인준했다. 당 강령과 구체적 사업은 전형위원회에서 선출할 집행위원회가 논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비밀조직의 보안을 위해서였다.


3인의 전형위원들은 곧바로 당 간부 인선에 들어가 결정을 각 개인에게 통지했다. 조선공산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는 당 간부를 선출하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로 김재봉을 선출했다.



극동민족대회 참가 후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입당


김재봉은 경상북도 안동 풍산면 오미동 출신이다. 집안은 부농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양반가 자제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10대 후반까지는 집안에서 한학을 익혔다. 대구 계성학교를 마치고 1912년에 입학한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를 1914년에 졸업한다. 졸업 후 낙향해, 당시 지식인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고향에서 강습소를 열어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전수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미마을은 한 마을에서만 20여 명에 가까운 독립유공자가 있는 곳이다.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와 만주지역 사회주의 활동에 종사한 바로 옆집의 당숙뻘 김응섭이나 의열단의 김지섭,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김만수 등이 모두 한마을 한집안 사람이니 김재봉 또한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 체포를 피해 같은 해 상반기에 서울로 올라와 만주일보 기자로 재직한다. 그는 이 무렵 반일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 인척이던 안상길이 상해임시정부에서 경상북도 연락책임자를 맡아 서울에 돌아온 때는 9월이었다. 김재봉은 경성공업전습소 동문인 이준태와 함께 임시정부 선전과 자금모금을 하다가 1921년 1월에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김재봉은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극동민족대회가 열리는 소련으로 향한다. 극동민족대회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태평양의 신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전승 4개국(미국‧영국‧프랑스‧일본)이 워싱턴에서 개최한 태평양회의에 대응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동아시아 피압박 민족을 대상으로 조직한 회의였다. 당시 독립운동진영에서 워싱턴 회담에 목매달던 일부 외교청원론자들과 다르게, 독립운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모색하거나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던 세력들이 모스크바로 향했다. 1922년 1월에 시작된 회의는 2월에 마쳤지만, 김재봉은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극동의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에 1년 3개월을 더 머무르며,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한다.



박헌영 “진보적 당 최초의 위대한 지도자”


이후 그의 행적은 해방 후 김재봉의 추도식에서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이 낭독한 추도사에 잘 드러난다. “(이 시기는) 동무의 민족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전환한 시초였으며 실로 동무는 조선인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최초의 1인이었다. 때는 마침 코민테른에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는 일국 일당의 원칙하에 통일조직하라는 지령하에서 양파연합간부를 지정하여 합동재조직을 준비하였음으로 이 합동공작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결국은 양파는 각각 조직되어 이 분립조직된 이르쿠츠크파의 중앙간부의 일인으로 선임되었고 그 후 양파는 결국 해산케되며 동지들과 같이 조선내지에 잠입하여 당조직에 전력하여 신사상연구회 화요회에서 표면운동을 하였고 이면으로 당내 지부에서 활약하다가 피검되어 당시 영어생활을 하였다.”


박헌영의 추도사에 나온 바대로 김재봉은 1차 조선공산당의 파괴로 1925년 12월 19일 밤에 체포돼 1931년 11월 18일 출옥했다. 오랜 지하활동과 가혹한 고문으로 쇠약해진 몸은 쉬이 회복되지 못했고 일제의 집요한 감시로 운동의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 노동자 농민층에 꾸준히 혁명적 교양 사업을 지속한 것으로 박헌영은 추도사에서 말하고 있다. 몸이 쇠약해진 탓일까. 그는 54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1944년 3월 22일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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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공산당 재판을 알리는 신문기사.



1946년 3월 30일 토요일 오후 4시, 서울 소공동 근택빌딩에 자리 잡은 조선공산당 본부에 조선공산당 총비서인 박헌영을 비롯한 당의 주요 간부 100여 명이 모여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의 추도식을 열었다. 이날은 김재봉의 음력 기일이었다.


1925년 창립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의 추도식은 엄숙하고 의례를 다 갖추어 진행됐다. 당 서기국장 이주하의 개회사에 이어 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추도문을 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이 낭독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는 당 총비서였던 박헌영의 추도사였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후 김재봉의 고향인 안동을 방문해 유족을 만나기도 했다.


“김재봉 동무는 … 가장 진보적 당의 최초의 지도자로서 …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에 대한 박헌영의 경의의 표현이었다.



* 박헌영, 1946. 3. 30 <解放日報(해방일보)> ‘1946. 4. 1. 故 金在鳳 同志를 爲한 追悼辭(要旨)(고 김재봉 동지를 위한 추도사(요지))’

** 위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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