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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바이러스 자본주의


전염병, 자본주의,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체제의 문제다


이태진┃충북



세계적 전염병 확산과 유행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 등, 2000년 이후 주기적으로 바이러스 전염병 대유행이 발생하면서 노동자와 시민들을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최근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처럼 연도를 나타내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향후에도 주기적으로 이런 바이러스의 유행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기술과 의학도 발전하지만, 그만큼 세계적 전염병도 주기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왜 우리는 각자도생해야 하나?


감염병에 대응하는 사회적‧집단적 능력은 ‘공공재’라는 것이 정설이다.


공공의료, 건강권 보장, 재난 대응 등의 공공재가 취약하면, 지금과 같은 사회적 재난조차 개인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지금 우리가 이토록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여기저기서 ‘확진’과 ‘치료’만을 거론하지만, 실은 감염이라는 현상 뒤에 감춰진 현실, 그리고 경계선 바깥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깨져버린 일상, 곧 일과 직장, 가게와 생활, 흐트러진 갖가지 돌봄을 회복하기 위해선 공공재가 필수적이다. 이것이 빈약하기에, 불안과 공포는 더욱 커진다. ‘작은 위험으로도 망할 수 있다’는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차별받고 배제될 것이라고 느낀다면, 모든 걸 개인이 견뎌야 한다고 판단하면, ‘나 혼자라도 결사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인권이 곧 방역


“인권이 곧 방역”이라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HIV(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전문가와 활동가들은 ‘HIV가 전세계적으로 확산한 데에는 바이러스 자체의 감염력보다 이 바이러스와 질병을 둘러싼 공포와 차별이 더 큰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차별과 낙인의 두려움 없이 자신의 감염 여부를 안전하게 검사할 수 있는 여건 △질병에 관한 정보가 공동체에 충분하게 전달될 수 있는 기반 △필요한 경우에는 감염인이 자신의 감염을 밝히고 적절한 전염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환경 등을 조성할 때, 비로소 질병과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에 직면한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 공포와 불안을 종용하고, 그 화살을 혐오와 배제로 바꿔치기하는 정치와 언론을 통해서 마녀사냥은 계속되고 있다. 사태 초기부터 미래통합당은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했으며, 중국인이 마치 바이러스인 것처럼 호도했다.


그 후 한국에서는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이 마녀사냥의 제물이 되고 있다. 31번 확진자의 등장을 계기로 신천지 대구교회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표적이 되면서, 각 지자체를 포함해 군대‧지역사회‧사업장 등 가릴 것 없이 ‘신천지 신도 찾기’에 혈안이 됐다. 이제 신천지 신도는 마치 죄를 지은 역적이 되고 마는 형국이다.


물론 신천지의 전도 활동 방식도 문제지만, 감염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숨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차별과 낙인으로는 지역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아이러니: 지침과 매뉴얼은 어디에?


우리가 일하는 일터는 많은 경우 다중이 한 곳에 밀집해서 모여 있기 때문에, 감염병의 전파가 쉽고 확산할 우려도 크다. 코로나19 감염이 확산하면서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는 예방을 위한 지침과 매뉴얼을 작성해서 사업장에 배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 형태, 사업장 규모, 노동조합 유무에 따라서 해당 지침과 매뉴얼이 실제로 적용되는 양상은 천지 차이다.


현재 일부 사업장에서는 해외를 나갔다 온 노동자들에게 강제로 14일간 휴가를 사용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 보건소에서 자가격리 통보를 받은 노동자에게도 휴가 사용을 강제하고 있다. 강제 연월차 소진도 문제지만, 무급휴가는 더 심각한 문제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장 생계 문제가 절박하게 걸려 있는 노동자들은 설령 증상이 의심된다고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자가격리를 결정하기 어렵다.


바이러스 감염 및 전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등 고용 형태를 결코 따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방을 위한 양상이 각자의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르니, 온전한 감염 예방이 이뤄질 수가 없다. 특히 이런 재난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영세 하청업체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책임은 고스란히 사각지대에 남겨진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대한감염학회를 비롯한 전염병 관련 학회들이 지난 22일 “코로나19 지역사회 확산 피해 최소화를 위한 권고안”에서 ‘노동자들의 경우 호흡기 증상이 의심되면 진단서를 내지 않아도 쉴 수 있도록 보장하라’고 촉구한 것도 이런 취약한 사각지대에서 전염이 발생할 수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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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공공운수노조]



과로사를 조장하는 장시간 노동


방역과 치료 등 코로나19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최일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과 의료종사자, 공무원들이 이제 헌신과 희생을 넘어서 과로사로 쓰러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일선에서 치료에 나서고 있는 의료 노동자들에게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의료진의 노동시간이 과도하지 않도록 쉬는 시간을 확보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정신과 관련 상담을 제공하라는 권고도 덧붙였다.


1주일에 5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정상적인 수준이 아니다. 과로사를 조장하는 명백히 비정상적인 노동이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재해‧재난 상황’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했던 특별연장근로를 ‘시행규칙 개정’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더욱 확대해줬다. 이제는 ‘업무량 급증’ 같은 경영상 사유에 대해서도 인가를 내주고 있다. 정부와 자본은 코로나19 관련 사업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경기 침체를 이유로 자본의 이윤을 보장해주기 위해 특별연장근로 확대를 활용하고 있다.


최근 노동부가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한 180개 사업장 중에서 방역과 마스크 등 코로나19 관련 사업장이 107개인데, 나머지 73곳에 대해서는 ‘생산량 증가’ 등 경영상 사유로 인가를 내줬다. 재난 상황을 이유로, 심지어 경영상황을 이유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침해하고 과로사로 내모는 것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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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사태로 택배와 마트 배송 노동자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이 극한의 노동 강도에 시달리고 있어 이들의 안전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진: 참세상]



재난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일할 권리, 거부할 권리


사용자는 노동자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안전배려의무를 지고 있다. 따라서 소속 노동자(하청‧파견‧용역 노동자 포함) 가운데 감염병에 걸리거나 격리 대상자가 발생하면 즉시 적절한 격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일터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염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들이 필요하다.


해당 조치들은 사업주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일할 권리’와 ‘위험을 거부할 권리’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는 단체협약을 통한 권리 보장은 물론이고,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예방과 감염대책에 관해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지역사회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


지난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학회지에 실린 논문 <2015년 한국 메르스 사태 1년 이후 생존자들의 정신과적 문제>에 따르면, 메르스 확진 판정 후 완치된 환자 63명 중 40명(63.5%)이 완치 1년 뒤에도 상당한 수준의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었다. 메르스 생존자들이 보인 정신과적 증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수면 문제, 불안, 우울, 자살성, 공격성, 중독 등 다양했다.


전문가들은 메르스 생존자들의 이런 어려움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들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메르스 환자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전파자’ 또는 ‘가해자’로 간주하는 사회적 시선과 편견이 환자들의 정서적 어려움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게 연구진의 판단이다.


따라서 코로나19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종식시키고 우리가 함께 공존하며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안과 공포,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더 이상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곧 노동자 개개인이 질병과 감염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업장에서, 지역사회에서, 국가 시스템에서 공동체가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사회주의적 해결방식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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