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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테제

: 현재의 반동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전집 읽기 모임



‘대중’의 혁명, 다중의 혼돈


1917년 2월 혁명으로 르보프-케렌스키 주도의 자유주의+중도좌파 임시정부가 들어선 후, 러시아는 여러 의미의 이중권력 상태를 맞게 됐다. 수도 페테르부르크에는 제정(帝政) 시기부터 존재했던 ‘정통’ 의결기관인 의회(두마) 외에, 노동자‧농민‧병사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사회혁명당 세력이 참여한 페트로그라드 평의회(소비에트)가 공존했다. 소비에트는 의회를 부르주아 권력으로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조금씩 자신의 권력과 지지를 떼어주는 양상이었다.


한편, 제정의 유지를 주장하던 자본가‧지주‧귀족으로 이뤄진 입헌민주당(카데츠)이나 진보당은 임시정부에 일부 참여하는 동시에 ‘조국 방위’를 위한 세계대전의 승리, 황제의 신분 보장 등을 주장하며 꾸준한 압박을 펼쳤다. 전황이 여전히 러시아에 불리하고 노동인민은 생필품 부족으로 대부분 전쟁에 반대하는 상황인데도, 임시정부는 계속 ‘혁명적 조국 방위’를 강조하며 전쟁 수행을 밀어붙였다.


이 와중에 구(舊) 볼셰비키,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혁명당 상당수는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천명하며 좌파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그런 상황에서 레닌은 스위스에서의 망명 생활을 끝낸 후 러시아로 돌아왔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언명을 담은 <4월 테제> 발표를 필두로 이후 10월 혁명을 이끌 신(新) 볼셰비키의 기조를 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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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보다는 가능성을


“벗이여, 모든 이론은 회색일세.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뿐이라네.”

- 괴테, <파우스트>


레닌의 저작이 항상 그렇지만, 유난히 어지러웠던 1917년 4월 그가 발표한 글들은 급변하는 정세 속 세력들의 상호관계를 이념적 교조에서 벗어나 면밀하면서도 확실하게 포착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

- “이중권력”, <4월 테제> 64쪽


당시 사회주의자 대다수는 임시정부를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 상당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한 후에’ 노동자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암송한 공식들을 분별없이 되뇜으로써”, 2월 혁명 속에서 이미 투쟁기관이자 민주적 권력기관으로 기능하는 평의회의 역할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인구와 의식화‧세력화 정도가 미약하다’는 변명을 내세워, 평의회가 보여준 가능성을 임시정부로 수혈하는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좌파가 손을 놓은 사이에 개량주의자들이 ‘임시정부의 점진 개혁에 힘을 실어야 안팎의 혼란을 타개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 건 어쩌면 당연하다.


어느 곳이든, 어느 시대든 대중적 급변사태 시 인구 대다수 노동인민의 민주적 의결‧투쟁기구가 자리 잡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착취 계급의 직접민주주의 맹아가 이후 지배권력에 의해 갑자기, 혹은 조직 내 유화적 세력에 시나브로 스러지는 모습도 역사에서 낯설지 않다.


1917년 4월 레닌의 글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평의회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입장에 반대하는 볼셰비키를 “고물 보관소에나 수용해야 마땅하”며 “소부르주아지에 대해 일종의 보증”이라고 가차 없이 비판한 점이다. 좌파가 모든 역량을 “소비에트… [노동자‧농업노동자‧농민‧병사 속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 집중해야 실제로 노동인민 해방의 가능성에 다가갈 수 있음을, 정권 교체의 순환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착취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언제든 노동자 혁명에 완벽한 적기(適期)란 없다


좌파의 역할과 지향 수정이 중요했던 시기답게, <4월 테제>에 수록된 글 대부분에서 레닌은 부르주아 계급과 임시정부, 우파에 대한 비판보다도 좌파 내 사상적 엄밀함을 더 자주 다룬다. 레닌의 관점에서 그의 사고과정을 담은 책을 읽는 우리로서는, 그리고 그 혁명이 성공한 사실을 아는 (어쩌면 또 다른 “암송한 공식”에 길든) 후대의 독자들로서는, 1917년의 교조주의자와 개량주의자들을 ‘명민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이라고 폄하하기 아주 쉽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다시 생각해 보자. 러시아는 인구 중 농민처럼 “소경영주, 소부르주아고,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혼란에 마주한 상황이었다. 결국 10월 혁명을 일궈낸 세력은 평의회라는 명백한 조직적 기반이 있었을진 몰라도, 이상적인 계급적‧의식적 기반이 충분치 않고 어쩌면 국가‧경제‧사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다.


바야흐로 2020년은 1917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맥락에서 대격변이자 격랑의 시기다. 세계 피억압 계급을 휩쓸며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을 빠짐없이 노출한 코로나19 대유행과 공황, 가자지구‧카슈미르‧홍콩에서부터 수단‧칠레‧미국‧벨라루스‧프랑스에 이르기까지 타오르는 인민의 소요 등등.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적 불안정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비정규-불안정 노동자의 착취와 정규직 감축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여러 부르주아 정권의 일관적인 공세에 피폐하고 피로해진 노동운동진영은 지향점을 상실하고 입장 번복과 내분을 되풀이하며 투쟁기관으로서의 역할마저 상실하는 모양새다.


지금이 노동운동에 큰 위기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쩌면 1917년과 마찬가지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확고한 전망을 갖고 노동자계급 속에서 끈질기게 분투하는 자들이 있다면 길을 개척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과연 어디서 나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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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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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노동자역사 한내]



언제든 노동자 혁명에 완벽한 적기(赤旗)란 없다


1917년에 “국제주의의 신봉자라고 맹세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뱅이뿐”이었듯, 현재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노동해방을 주장하는 세력이나 인자는 많다. 하지만 레닌은 자칭 사상적 지향(“색조”)이 아닌, 세계대전 당시 계급구도 내 사회적 역할(“조류”) 면에서 구체적으로 각국 좌파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 “입으로는 사회주의자지만… 조국옹호를 승인하는” 사회배외주의자

- “배외주의자와 실제의 국제주의자 사이에서 동요하”며 “자국 정부에 대한 혁명의 필요를 확신하지 않으며, 선전하지 않으며… 투쟁을 수행하지 않”는 중앙파

- 각국에서 실제적인 계급투쟁을 추진하는 국제주의자


현재 한국의 상황에 빗대면, 배외주의자는 계급의식 고취보다 부르주아 정부의 이익을 따지며 초계급적 대화나 협상, 양보를 추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국제주의자는 엄밀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하며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활동가일 것이다. 물론 “개개의 인물은 때때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사회배외주의 입장에서 중앙파 입장으로 이동하며, 그 반대의 상황도 벌어진다.” 레닌은 명백히 두 부류를 <4월 테제>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봤다: “부르주아 정부에… 요구를 하는 데 머무는 것은 사실상 개량주의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를 이렇게 분류한다 해도, 세 번째가 ‘노동해방의 희망’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지금 상황이 너무나 어렵지 않은가? 레닌도 당시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자와 국제주의자가 “소수일 뿐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문제는 쪽수가 아니라 진정으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과 정책을 올바르게 표현하느냐다…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에도 실제의 국제주의자일 수 있느냐다.” 요점은 현재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진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다. 계급투쟁에 필요한 의식을 상황에 맞게 어떻게 (전세계) 노동계급과 그 의결기구에 퍼뜨릴 수 있는가, 그들의 투쟁 역량을 어떻게 확대해 나갈 수 있는가다.


“의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당, 공산주의 당의 분자들을 훈련시키고 결속시키는 작업, ‘전반적인’ 소부르주아적 도취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키는 작업이… 실제로는 가장 실천적이고 혁명적인 작업이다.”

-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같은 책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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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ed Historia]



레닌을 읽고서: ‘엄밀하게 관대하게’


여기까지 (우리의 지난 글을 모두 읽든 읽지 않았든) 오신 독자는 물을 것이다: 그럼 어지럽고 지난한 상황에도, 노동계급의 투쟁 역량을 키울 방안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레닌은 현재 우리에게 과연 어떤 답을 제공하는가? 이에 적절한 인용구 하나로 끝맺는다.


“[대중이 부르주아의 입장을]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성과 싸우는 것에 의해서만 (그런데 이 싸움은 오로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지적 설득에 의해, 생활의 경험을 보이는 것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횡행하고 있는 혁명적 공문구의 광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적 의식도, 대중의 의식도… 진정으로 북돋을 수 있다.”

-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같은 책 95쪽


[함께 읽을 레닌의 글]

- 레닌전집 66권(“4월 테제”), 양효식 역, 아고라, 2020.



* 이번 호를 끝으로 <무엇을 할지 묻는다면 레닌> 연재가 종료됩니다. 그동안 힘써주신 “레닌전집 읽기 모임” 동지들과 이 코너에 관심 보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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