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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대의원대회-집행부 사퇴 이후:

혼란과 동요를 딛고, 

진정 계급적 ‘책임’을 완수하자


김석┃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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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24일, 민주노총 집행부가 사퇴했다. [사진: 노동과세계]



‘책임’이라는 말로 ‘퉁’칠 수 없는 것들


지난 7월 23일, 민주노총 25년 역사상 초유의 ‘온라인’ 대의원대회는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대표자회의 합의 최종안>을 부결시키며 마무리됐다. 민주노총 위원장-수석부위원장-사무총장 등 집행부는 그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퇴함으로써 책임을 졌다’고 강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번 사태가 민주노조운동에 남긴 상처와 노동자계급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결코 ‘책임’ 운운으로 위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명환 집행부는 노사정 합의를 밀어붙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언론과의 소통은 풍성하게 진행했지만, 정작 민주노총 내부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무시로 일관했다. 당장 작년에도 김명환 집행부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반대에 직면한 바 있다. 이런 사정을 빤히 알면서도 이번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먼저 나서서 제안하더니, 대체 어떤 합의를 주고받은 것인지 공개조차 하지 않은 채 한동안 협상을 이어가다 조인식 직전에야 합의문을 툭 던졌다. 온 과정이 폭력적 의사결정으로 점철됐다.


민주노총의 여러 산별조직 대표자와 지역본부장들로 이뤄진 중앙집행위원회(중집) 구성원 다수가 합의안에 반대했고, 무엇보다 해당 합의안이 명분으로 삼았던 당사자인 비정규직 현장 조합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변혁정치> 110호 이슈 “주먹 대신 뺨 내민 민주노총” 참조). 그런데도 집행부는 노사정 합의안 찬반을 묻는 대의원대회를 소집했고, ‘규약상 위원장의 권한’이라는 강변으로 정당화했다. ‘중집 결정으로 사회적 대화를 승인받겠다’던 당초 자신들의 약속마저 뒤집고, 노사정 합의안에 항의하는 다수의 반대의견을 ‘규약상의 권한’을 내세워 묵살했다.


이 폭력적 의사결정을 뒷받침하고자 집행부가 의지한 건 또다시 ‘정파’ 구도였다(이번 호 <변혁정치> 칼럼 “‘정파’ 프레임, 그 간교한 의도와 역사적 궤적” 참조). 노사정 합의에 반대하는 의견을 ‘대책 없는 강경파’로 몰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노사정 합의가 승인되지 않자 ‘정파에 좌우되는 민주노총’이라고 분식하는 언론플레이를 펼쳤다. 이런 구도 속에서 조합원 대중은 거짓 계몽과 교화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정파를 넘어 대의원과 직접 소통하겠다’던 공언과는 달리, 지난 7월 23일 ‘온라인’ 대의원대회는 조직적 논의도 없이 그저 찬반만을 묻는 방식으로 강행됐다. 이것이 소통의 자리가 될 리 만무했다.



절차 이전에, 인식부터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한 평가를 이러한 절차적 문제와 집행부의 아집만으로 한정해선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펼쳐진 정세에 대해 적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를 우선 지적해야 한다. 코로나19의 문제는 그저 바이러스 문제가 아니었다. 코로나19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취약한 부분을 더욱 가혹하게 공격했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시화하면서 정권과 자본이 보여준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위기를 목놓아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진 자들이 한껏 챙길 기회를 최대한 누리려 한다.


이들은 위기론을 설파하는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고통분담’을 요구한다. ‘국가 차원의 위기 대응’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급적 이해관계는 은폐된다. ‘국민경제의 위기 앞에 고통분담은 불가피하며, 양보와 타협은 미덕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지만, 노동자계급은 이제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 대처’라는 미명하에 ‘국민적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기만에 시달리게 된다.


노동자계급이 ‘경제 살리기’나 ‘경제 위기 대응’이라는 제안에 공명하는 순간,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 기운다. 정권과 자본이 짜 놓은 프레임 속에서 열세와 방어 국면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자본은 위기의 다른 한편에서 한껏 기회를 누린다. 여론을 등에 업고 고통분담을 강요할 기회, ‘기업 살리기’를 위한 규제완화를 당당히 요구할 기회, 위기를 버티지 못한 다른 자본을 집어삼키고 몸집을 불릴 기회, 떳떳하다는 듯 세금 감면을 요구하고 재산을 늘릴 기회, ‘신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정부의 각종 지원을 받아먹을 기회.


이처럼 코로나19의 충격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경제 봉쇄 국면에서도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생계를 위해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빈민들, ‘기업 살리기’ 앞에 해고 이외의 선택을 부정당한 노동자들에게 코로나19는 더욱 가혹했다. 경제위기의 직접적인 타격을 더욱 아프게 받은 저임금‧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들에게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하자’는 정부와 자본의 주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정권의 꽃놀이패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적어도 노동자계급에게는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민주노조운동에 필요한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양보와 타협’이 아니라, 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추궁하고 그 대안을 대중적으로 모색하는 일이었다.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 대(對)정부‧대(對)자본 투쟁이 필요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작금의 위기 정세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 속에 노사정 합의로 빨려 들어갔고, 그 이후의 경과는 앞서 지적한 바대로다.


사실 이런 몰계급적 정세 인식은 민주노총 집행부뿐만 아니라 여러 중집 위원을 포함해 꽤 광범위하게 동의지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기반한 기회주의적 동요로 인해, 조인식 직전까지 갔던 노사정 합의에 대한 대중적 반대가 아래로부터 결집한 게 오히려 의외의 상황이라고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이러한 노사정 합의 반대 흐름은 집행부의 폭력적 의사결정으로 동력을 더하게 됐지만, 오히려 ‘정세적 맥락을 도외시한 교조적인 노선 다툼’이라는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


한편, 문재인 정권에게도 코로나19 사태는 이미 위기에 봉착했던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재벌체제에 면죄부를 주고 돌파구를 열어줄 기회였다. 이 정권에게 노사정 합의는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민주노총을 순치시키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 여론을 일으켜 노동 유연화를 압박할 수 있는’ 꽃놀이패였다.


민주당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규제완화와 ‘기업 살리기’ 등 자신들의 처방을 정당화하고 더욱 진전시키고자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에겐 노동운동진영 역시 자신들이 짜는 새로운 주류질서 속에서 재구성돼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노동개악 공세로 드러났던 문재인 정권의 반(反)노동 기조 노골화는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힘을 더해가고 있다. 이 와중에 민주노총이 노사정 합의의 늪에 스스로 뛰어들었으니, 얼마나 대견했겠는가? 문재인 정권과 언론의 전방위적인 ‘김명환 집행부 감싸기’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민주노총의 과제와 진정한 ‘책임’


적극적인 ‘노사정 합의 반대’ 운동이 벌어진 결과 지난 7월 23일 온라인 대의원대회에서 합의안 통과는 거부되고 다음 날 김명환 집행부가 사퇴했지만, 민주노총에게 내외의 조건은 그다지 좋지 않다. 한동안 지도력과 조직력은 위축될 가능성이 크고, 정권과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여론을 동원한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하지만 노사정 합의 반대 흐름이 결집하면서 긍정적인 면도 보여주었다. 집권 하반기 문재인 정권의 반(反)노동 기조에 대한 조직 내 인식이 보다 명확해졌으며, (외견상 주요 정파를 막론하고) 투쟁 전선을 더욱 날카롭게 다시 세워야 한다는 데 대한 동의지반이 구축됐다.


민주노총의 과제는 명확하다. IMF 사태에 버금가는 지금의 위기에서 노동자들의 참담한 상황을 받아 안고 싸우는 계급대표성을 확충해야 하며, 문재인 정권의 반(反)노동 기조에 맞선 투쟁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진정 계급대표성을 획득하려면 당연하게도 현재 경제위기의 전면에서 삭풍을 맞고 있는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을 드러내야 한다. 민주노총은 이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방패이자 창이 되어야 한다. 투쟁전선의 구축은 문재인 정권의 친자본‧재벌 살리기 강화와 더불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노동운동 우경화 재편 기도에 맞선 투쟁으로 구체화돼야 한다.


집행부 사퇴 이후 구성되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에서, 그것도 직선 3기 위원장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노총에게 견결한 투쟁전선의 구축은 물론 녹록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한계에 처한 체제를 보위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자본에 쏟아붓고 초과 착취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총자본의 계급투쟁이다. 저들이 말하는 위기 대응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방어에 급급해한다면, 운동장은 더욱 기울 뿐이다.


위기는 평등하지 않으며, 대응은 계급적일 수밖에 없다. ‘경제 살리기’가 아니라,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다.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아니 코로나19 사태 자체를 가져온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 노사정 합의 강행 사태가 야기한 혼란과 동요를 시급히 끝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위기에 대한 노동자들의 당면 요구와 함께 공적 자금 투입 기업 국유화를 비롯한 급진적 요구를 결합하는 싸움을 조직해야 한다. 구조조정‧폐업 사업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이 상황에서, 머뭇거리고 있기엔 우리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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