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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변혁당 선전위원장


“대중과 접점 있는 의제를

대중적인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

사회주의 대중화”



# 91년생, 서른 살 송준호 씨는 변혁당 선전위원장이다. 2016년 8월 변혁당에 가입했고, 올해부터 당 전임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에서 영상 시나리오를 전공하고 영상을 만들던 준호 씨는 변혁당이 더 젊어졌으면 하는 바람, 더 많은 사람과 만나야 한다는 바람으로 선전위원장을 맡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당을 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당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준호 씨를 만났다.



영화를 좋아해 진학한 예술대학


준호 씨는 중학생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현장이 재밌을 것 같아서” 추계예대 영상시나리오과에 입학했다. 학교 규모가 작아서 꿈꿨던 캠퍼스 라이프는 없었지만, 서울에 왔다는 것만으로 설렜다. 정신없이 친구들을 사귀었고, 시나리오 작업도 걸음마부터 배웠다. 영화 공부는 재밌었다.


그러던 2011년 9월, 준호 씨가 다니던 추계예대가 ‘부실대학’으로 선정됐다. 이명박 정권이 대학 구조조정 칼날을 들이대며 대학을 취업기관으로 전락시키려던 때였다. 부실대학에 선정되면서 학자금 대출, 교수 연구비 등 제도적 제한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마음에 큰 생채기가 생겼다.


“내가 다니는 대학이 ‘부실대학’이라니 상처를 받았죠. 사회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 느낌이었어요. 사실 예대 진학하면 4대 보험 포기하고 사는 거거든요. 예술로써 나 자신에게, 사회에게 내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일인데, 그게 쓸모없다는 낙인이었어요. 부실대학 선정되고 과외 잘린 친구들, 명절에 집에 못 내려가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준호 씨는 당시 학보사 사회부장이었다. 부실대학 선정 후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학교 측에 답변과 책임을 물었다. 수백 명의 학생이 모였다. 준호 씨는 학보사 호외를 내면서 투쟁 상황을 꾸준히 알렸다. 그다음 해인 2012년엔 총학생회장까지 맡게 됐다.


“부실대학을 선정하는 여러 지표 중 20%를 차지하는 게 취업률이었어요. 그것에 맞서 싸웠어요. 예술계열에 취업률을 평가 잣대로 들이대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친구들과 ‘너희 지표대로면 피카소, 채플린도 실업자다’ 피켓을 들기도 했고, 세종문화회관이나 서울역에서 집단 플래시몹도 했어요. 결국 청와대에서 예술계열 학생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해서 그 자리에도 참석했고, 예대는 부실대학 평가에 임하지 않는 걸로 상황이 마무리됐죠. 아쉬운 것도 많지만, 학생들 지지가 높았어요. 학생회비 납부율이 80% 넘었거든요.”



“나도 세상 살면서 어느 편에 서야겠다” 

생각하다 만난 변혁당


총학생회장 활동을 마무리하고 1년여를 쉬다 군대에 갔다. 그곳에서 변혁당 활동가를 만났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구조조정 투쟁하면서 중립은 없다는 생각, 나도 세상 살면서 어느 편에 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학교 근처에서 재개발이 벌어지면서 쫓겨난 분들이 있었어요. 늦게 알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것도 별거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진보정당, 조직 등을 찾아다녔죠. 그러다 군대에서 변혁당 활동하는 후임을 만났고, 같이 공부하다가 당 활동을 제안받게 된 거예요.”


5월 1일, 당시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변혁당의 전신)>에서 노동절 총파업 집회를 한다고 해서 찾아갔다. 민중의례도 처음 접했다. 말끝마다 ‘투쟁’을 외치는 것도 교회에서 ‘아멘’을 외우는 모습 같아 낯설었다. 2016년 1월 변혁당 창당총회에도 참석했는데, 준호 씨는 변혁당의 첫인상을 무서움으로 기억했다. 그럼에도 당에 가입한 건 사회주의가 옳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강령 토론하는데 소리 지르면서 굉장히 격렬하게 싸우더라고요. 그런데 사회주의, 맑스주의 얘기를 들을수록 다 맞는 말 같았어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몰랐으면 모르고 살았겠지만, 이미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하고는 못 살 것 같았죠. 이걸 실현하는 조직이 변혁당이라고 생각했고요. 무엇보다 ‘실천하고 투쟁하는 정당’이라는 점에 끌렸어요. 이슈 띄우기만 하는 다른 당보다, 변혁당이 가장 앞에서 싸우는 모습이 좋았어요.”


이후 기관지위원회, 정치캠프 선전팀 등 당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의견을 냈다. 막 활동을 시작한 준호 씨에게 당의 소통방식이나 문화는 견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80년대부터 내려오는 운동권의 문화? 이곳의 일처리 방식, 사고방식, 논리전개 방식, 의사결정 방식 등이 낯설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과하다 싶었고요. 지금도 사회 일반의 경향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실무팀에서 논의해서 안을 만들어도 그게 중앙집행위원회(중집)나 전국위원회에서 뒤집히더라고요. 그때는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어요. 지금은 중집 일을 하면서 일이 어떤 과정으로 이뤄지는지 좀 더 이해했지만요.”



사회주의 대중화,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바라봐야


선전위원장은 ‘사회주의 대중화 3년 계획’을 보고 마음이 끌려 결심하게 됐다. 우리 당도 뭔가 해보자는 변화의 분위기를 느꼈고, 그간 고민해온 것들을 책임지고 실천하고 싶었다.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싶었죠. 1~2주 정도 깊이 고민했는데, 사회주의 대중화 계획을 보고 결심했어요. 당 선배들도 5~60대가 됐고, 뭔가 다른 시도를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앉아서 고사할 거냐, 뭐라도 한 번 해보고 평가받을 거냐. 후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찬성했고, 그만큼 나의 역할을 해야겠다고 여겼어요.”


선전위원장 활동이 쉽지는 않다.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준호 씨는 ‘되게 힘들다’고 답했다. 꿈에서도 당 사업을 하다 실수할 정도다. 하고 싶은 것, 하려고 했던 것은 많은데, 사람들 마음이 다 내 마음 같지는 않다.


“당에 도움이 되려고 했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힘들죠. 이번에 <코로나19 위기와 사회주의 처방전> 소책자를 낼 때도 다 같이 논의해서 결정했고, 제 나름대로 노력해서 준비했어요. 그런데 내고 나서 책값이 부담된다거나 지역에서 팔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속상하죠. 한편으로는 조직이 상당히 견고하다고 느껴요. 바늘 틈조차 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해요. 내 의견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다는 아쉬움 같은 거요. 저는 운동을 오래 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다른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래도 당원들과 만나는 건 늘 힘이 된다.


“선전위원장 되고 지역 시‧도당과 간담회를 진행했어요. 몰랐던 분들도 알게 되고, 지역상황도 더 알게 됐고요. 충북도당은 그날이 마침 선전전 하는 날이라 함께했는데, 그런 사소한 것도 좋더라고요. 당원들의 요구를 다 받으면 좋을 텐데, 쉽지는 않아요. 이런 작업이 뒤늦게 시작돼서 아쉬운 것도 있고요.”


준호 씨는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해 ‘대중화 사고’를 달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대중화는 곧 외화’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중화는 선전만이 아니거든요. 대중과 접점 있는 의제를 대중적인 방식으로 조직하는 일, 3단계를 갖춰야 하죠. 기획부터 그렇게 해야 하고요. 우리 당이 집중하는 재벌 문제도 이 관점에서 기획하고 집행해야 하는데 부족함이 많죠. 당원들도 좀 더 움직여야 한다고 봐요. 성명 하나를 내더라도 당원들이 공유해줬으면 좋겠어요. 지역, 현장에서 우리 선전물이 돌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예요. 온라인 플랫폼도 구축해야겠지만, 당원 한명 한명의 역할도 중요해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우리 당을 알리는 역할을 부탁하고 싶어요.”


┃인터뷰: 나위(기관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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