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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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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맑스주의 논쟁사의 시작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1: 엥겔스의 기여


이재유┃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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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두꺼운 책을 끼고 연구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각자의 철학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특히나 이 자본주의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선 맑스주의자들은 지난 150년 가까이 자신들의 실천과 철학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지난 112호(9월 1일 자)를 시작으로 월 1회 연재하는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 코너에서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 편집자: 이 글은 앞서 <변혁정치> 112호(2020년 9월 1일 자)에 실린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의 1회차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맑스주의, 실천적 철학을 향해”에서 이어진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기사를 읽기 전에 앞의 글을 먼저 일독하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가 다룰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는 엥겔스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엥겔스는 맑스 생전에 맑스와 함께 활동했던 엥겔스가 아니라, ‘맑스 사후의’ 엥겔스다. 이 대목에서 약간 의문이 생긴다. 왜 ‘맑스 사후의’ 엥겔스로부터 이 논쟁사를 시작하는 것일까?


일단 맑스가 말년에 자신이 ‘맑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던 점(곧, 당시 ‘맑스주의자’를 자임하던 이들이 정작 맑스 자신의 논지를 왜곡시키고 있었음을 의미)을 환기해보자. 한편, 맑스 사후 맑스주의 논쟁의 시발점이 된 유물론의 성격을 바로 엥겔스가 자신의 저서 『자연 변증법』에서 밝힌 바 있다. 즉, 맑스의 말년부터 맑스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고 맑스 사후에는 그 논쟁이 더욱 격화했으며, 그 시작에 엥겔스가 있는 것이다.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

: ‘과학화’의 경향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은 ‘과학화’의 경향을 띠고 있다. 그 요인으로는 대개 두 가지가 꼽힌다.


첫째는 당시 사회주의운동이 광범하게 퍼져 나감에 따라 당원들에게 지침을 내릴 수 있는 철학이 더욱 필요하게 됐다는 점이다. 즉, 당원들이 운동을 펼치면서 현실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논리와 이론이 필요했는데, 여기에 당시 발전하고 있던 자연과학의 방법론(경험적인 실험과 관찰, 그리고 논리적인 수학적 증명)을 도입한 것이다. 이 점에서 엥겔스가 제시했던 철학 체계의 경향은 당시 영국의 근대 경험론(세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경험, 특히 감각적 경험으로 얻은 지식이 중요하다는 견해)과 독일의 근대 합리론(세상은 논리적인 진리로 구성돼 있으며, 이는 감각적인 경험이 아니라 이성적 방법으로 탐구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는 견해)에서 점차 중요시하던 과학적 방법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둘째는 엥겔스가 말년의 20여 년 동안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엥겔스는 1870년에 은퇴한 이후 리비히 씨(Herr Liebig: 독일의 화학자)의 표현처럼 “수학과 자연과학을 가능한 철저히 연마하였고, 8년에 걸쳐 최적의 시간을 여기에 바쳤다.”1 이러한 탐구는 맨체스터 대학의 화학 교수 칼 쇼를머(Carl Schorlemmer) 같은 일단의 과학자들과 밀접한 친분을 맺으며 이뤄졌다.



엥겔스의 ‘물질’ 개념

: 헤겔의 ‘절대정신’을 대체하다


엥겔스의 ‘과학화’ 경향은 맑스와 엥겔스의 접근 방법에서 차이를 초래했다. 이 차이는 엥겔스가 맑스의 저작에서는 전혀 생소한 개념인 ‘물질(matter)’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반뒤링론』에서 엥겔스는 “모든 존재의 물질성”에 관해 얘기하면서, “물질과 그 존재양식인 운동은 결코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물질과 운동은 그 자신이 스스로 궁극적인 동인(cause)을 이룬다”고 지적했다.2


물질에 대한 엥겔스의 이러한 견해는 쉘링을 비롯한 당시의 ‘생명력(life-force)’ 이론가 등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들과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물질’에 은밀하게 영혼을 불어넣고자 했다. 엥겔스 역시 자신의 견해 속에 매우 목적론적인 요소를 삽입시키고 있었다.


엥겔스의 물질론, 즉 엥겔스의 유물론에 내재한 목적론적 특성은 헤겔에 대한 엥겔스의 이해와 직결된다(헤겔은 이 세상을 ‘절대자로서의 정신’이 목적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다만 이 과정이 어떤 모순도 없이 전적으로 순탄하게 진행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이 세계의 온갖 모순 속에서 자기부정을 거쳐 완전한 ‘절대정신’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변증법’을 주장했다). 엥겔스가 목표로 삼은 것은 헤겔의 체계처럼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체계적인 유물론의 확립이었다. 그리고 엥겔스의 ‘체계적인 유물론’이란, 역사와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인 ‘절대자’로서의 ‘정신’을 ‘물질’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이 헤겔의 ‘정신’처럼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그리하여 엥겔스의 물질론은 헤겔의 아류로서 또 다른 형이상학이라는 오해를 강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엥겔스의 유물론적 개념에서 중심적인 사항은 그의 인식론에 있다. 엥겔스에게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란 ‘실제의 사물과 과정에 대한 다소 추상적인 영상이거나 반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념’이란 것도 ‘단지 실제 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을 의식 면에서 반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 변증법 역시 경험론의 반영론 특색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헤겔 변증법에서 이러한 경험론의 반영론 특색은 절대정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이는 ‘이성의 간지’(인간이 마치 자유의지에 따라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절대이성이 간교한 조종(‘간지’)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개념)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될 무렵에야 날아오른다’(‘지혜’의 상징인 ‘미네르바(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의 올빼미’가 황혼녘에야 날개를 펴듯, 철학 역시 사회적‧역사적 사건들이 지나간 뒤에 이를 ‘해석’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등의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외부세계, 즉 자연에 대한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은 것이라 평가된다. 그렇지만 이는 거꾸로 ‘절대정신’이 ‘물질’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엥겔스에게서 ‘절대정신’이 ‘물질’로 대체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 역시 ‘절대정신’으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절대정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헤겔 변증법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한 평가

: 세계의 ‘변혁’보다는 세계의 ‘해석’


이런 점에서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맑스가 그토록 강조한 ‘세계의 변혁’보다는 ‘세계의 해석’에 머무른다는 곱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평가는 엥겔스가 ‘실천’의 의미를 좁게 해석한 점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맑스가 ‘실천’의 의미를 ‘혁명적인 비판 활동’으로 강조한 반면, ‘실천’에 대한 엥겔스의 개념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라는 책에서 “실험과 근면”3으로 요약됨으로써 오히려 좁고 다소 유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4 이때 “실험과 근면”은 (‘절대정신’을 대체한 것으로서, 즉 ‘절대정신=물질’로서) 물질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의 의미를 갖는다. 즉, 앞에서 거론한바 헤겔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날아오른다”고 표현한 것처럼, 세계를 ‘변혁’하는 게 아니라 ‘해석’하는 데 머무른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근대 경험론‧합리론은 모두 세계를 ‘해석’하는 데 지나지 않았고, 이 둘을 종합‧통일한 헤겔 변증법 역시도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쳤다. 엥겔스 유물론적 세계관 또한 헤겔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세계를 ‘해석’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엥겔스에게 세계에 대한 해석은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경험론(유물론)적인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론(관념론)적인 형태로.



경제‧정치적 견해에 나타난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의 

이중적 특성


이러한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은 엥겔스가 유물사관을 정식화함에 있어서 ‘경제적 요소’의 역할을 평가하는 데서도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에 따르면, 역사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요인은 실제생활에 있어서의 생산과 재생산인 것이다. 맑스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만약 혹자가 이러한 주장을 마치 경제가 역사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왜곡한다면, 그는 우리들의 주장을 무의미하고 공허한 추상적인 말로 변형시키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모든 여러 측면의 요인들 간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하는데, 이와 같이 무수한 여러 가지 사건들 가운데에서-즉, 그 내부적 상호연관성이 지나치게 모호한 나머지 무시되어 버리기 쉬운 무수한 사건들 가운데에서-경제적 운동은 그 스스로 궁극적인 요인임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 “블로흐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발췌


①은 유물론(경험론)의 입장을, ②는 관념론(합리론)의 입장을 나타낸다. ①에서 드러나는 입장은 이후 베른슈타인이 대표하는 ‘수정주의’로 연결되며, ②에서 드러나는 입장은 이후 카우츠키가 대변하는 ‘경제결정론’으로 이어진다(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카우츠키의 경제결정론은 다음 연재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이처럼 엥겔스의 이중적인 세계관은 경제결정론과 수정주의 양쪽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엥겔스의 이중적 세계관은 그의 정치적 견해에서도 드러난다. 1847년 「공산주의의 원칙」을 저술한 이래 엥겔스의 생각 속에 지속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비(非)주관적 요인에 대한 강조의 결과, 엥겔스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엥겔스는 ‘국가가 소멸해야 한다’는 생각을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국가야말로 ‘미래에 프롤레타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정치형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말년에 이르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점차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자 맑스주의의 혁명적 성격보다는 ‘진화론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1848년의 혁명 전략(1848년 유럽 전역에 걸쳐 노동자와 하층 민중의 봉기가 크게 벌어진 바 있다)이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맑스의 「1848년~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개정판에 붙인 엥겔스의 서문(엥겔스가 죽기 직전인 1895년에 썼다)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성장은 마치 자연의 과정처럼 조용한 가운데 쉼 없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정치적 견해에서는 혁명적 내용이 상당히 약화됐으며, 그리하여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벌어지는 대립, 곧 경제결정론과 수정주의 양쪽 모두에게 유리한 논거를 제공한 것이다.



1 프리드리히 엥겔스(김민석 옮김), 『반(反)뒤링론』, 새길, 1987, 18쪽.


2 같은 책, 69~70쪽.


3 맑스의 ‘실천적 유물론’이라는 원칙을 가장 간명하게 정식화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엥겔스가 자신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라는 책의 부록으로 출판했다.


4 맑스는 ‘실천’에 관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포이어바흐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는…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하고 고정시켰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인’, ‘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칼 맑스(김대웅 역),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 두레, 1989,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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