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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01.18 15:06

10년의 시간이 남긴 것

유성기업 노조파괴 투쟁을 돌아보며

 

 

김성민┃충북(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 교육부장)

 

 

* 2020년 12월 31일,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는 마침내 회사와 협약을 타결하고 10년에 걸친 노조파괴 투쟁을 승리로 일단락지었다. 그 와중에 유성기업 영동지회 지회장으로 열사투쟁을 이끌기도 했던 김성민 동지로부터 10년의 싸움을 돌아보는 글을 받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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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 매일 매일이 바빠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저녁을 먹고 첫째, 둘째와 산책에 나섰다. 아빠와 오랜만에 저녁 산책을 하는 아이들은 막대기 하나를 주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재잘거렸다. 그러던 중 저녁 9시쯤 전화가 왔다. “본부장님!! 사업장에 직장폐쇄가 되었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당시 필자는 민주노총 충북본부 본부장이었다).

 

2010년 전국을 휩쓸기 시작한 노조파괴의 서막으로 발레오만도에 직장폐쇄가 떨어졌을 때,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토론한 적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2주 정도 지나면 우리도 깨질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자본이 공장문을 걸어 잠그고 용역깡패와 경찰을 앞세우면, 한 달 임금 없이 살기 힘든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탄압과 유혹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을 강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회사는 어용 복수노조로 노조파괴를 완성할 것이었다.

 

 

 

그렇게 투쟁은 시작됐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뭉칠 때 힘을 낸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노동조합이 투쟁할수록 단결은 강해졌다. 장기간 파업 도중 징계와 해고로 임금이 삭감되거나 아예 사라지고 조합비가 20만 원 가까이(해고자 신분보장기금 등을 위해) 올라도, 투쟁할 때는 서로 위로했다. 소주 한잔 나누며 우리가 옳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괴로웠다.

 

대표자들은 아낌없이 헌신했다. 노조파괴 분쇄 투쟁을 시작한 2011년 당시 지도부는 대부분 구속돼 법적 처벌을 받았다. 비대위는 조합원들을 공장 앞에 세웠고, 투쟁으로 조직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3개월간 이어진 공장 앞 굴다리 투쟁 끝에 절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현실에 타협하며 현장에 복귀하자, 우리는 법원의 판결로 일단 현장에 복귀했다.

 

현장 안에서 탄압에 맞선 투쟁은 대단히 힘겨웠다. 우리는 고립됐고, 연대의 기운을 받을 수 없었다. 우리끼리 힘을 모아 싸울 수밖에 없었고, 경찰과 노동부는 회사 편에서만 존재했다. 대부분의 조합원이 징계를 받았고, 27명은 해고당했다. 지도부는 해고자와 조합원들이 분리되지 않도록 애썼다. 그중 하나가 해고자 신분보장이었다. 조합원들 스스로 해고자들을 격려하고 보호하자는 것이었고, 해고자들은 선도투쟁에 나섰다. 지도부는 굴다리 농성과 옥천 철탑 농성 등 유성기업 노조파괴 투쟁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연대투쟁의 의미를 배웠다

 

‘연봉 7천만 원 귀족노동자들의 불법파업’이라는 딱지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까지 ‘그렇게 좋은 회사인데 왜 파업을 하느냐’며 현장복귀를 독려했다. 유성기업은 원청인 현대차의 지시로 노조파괴 전문집단 “창조컨설팅”의 도움을 받았고, 용역깡패와 경찰, 노동부, 심지어 청와대조차 노조파괴에 나섰다. 540명 정도의 작은 노동조합이 감당하기 어려운 싸움이었다. 우리끼리 집회 한번 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런데 말없이 농성장에 함께 앉아 함께 밥을 먹으며 함께 마스크를 쓰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옳은 투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너희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신들이 옳으니 우리도 함께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그렇게 ‘연대’라는 작은 힘들이 모여 10년의 투쟁을 지켰다.

 

연대는 연대를 낳았다. 연대투쟁의 의미를 알게 된 노동자들은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의 투쟁에 함께했다. 비가 엄청 쏟아지던 날이었지만, 투쟁 속에서 자유로웠고 즐거웠다. 다른 이들의 투쟁이 곧 나의 투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10년이었다. 도시락을 싸주던 단체. 영상을 찍고 만들어주던 단체. 각종 언론과 함께 싸우던 사람들. 같은 시기에 투쟁하던 사람들은 스스로 모였고, 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기나긴 투쟁은 상처도 남겼다

 

유성기업 투쟁이 현장 안팎에서 격렬하게 진행된 지 5년쯤 지났을 때, 법률대응비용 마련을 위한 후원주점을 기획해서 티켓을 팔기 위해 노조 간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렇게 주점을 하기로 한 바로 전날이었다. 2016년 3월 17일, 한 조합원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광호 형이 죽었대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직 추울 때였는데,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담배연기인지 입김인지 말 없는 탄식만 내뱉을 뿐이었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조합원들과 투쟁에 나섰다. 거대자본 현대차에 맞선 싸움은 너무나 힘들었다. 현대차를 상징하는 양재동 본사 표지석 앞자리에 앉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이 연행되고 처벌받았다. 조합원들은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서로 싸울 수도, 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광호의 죽음은 유성기업 회장 유시영의 구속을 만들었고, 각종 재판에서 노동조합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10년의 투쟁이 마무리되어갔다.

 

 

10년 전 그날 가벼운 산책을 하던 첫째가 올해 대학에 간다. 그날 그녀는 10살이었다. 5월 15일 돌잔치를 했던 막내는 이제 12살이다. 30대는 40대가 됐고, 50대는 정년을 맞았다. 임금인상 없이 정년을 맞은 형님들은 힘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조합원들의 자녀들은 어땠을까? 부모의 고통은 자녀들에게도 전해진다고 하는데…. 10년을 이렇게 마무리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투쟁도, 탄압도, 그리고 현재의 ‘평화로운’ 상황도 그렇다. 우리가 싸우고 연대하지 않으면 자본의 탄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나의 일로 닥쳐야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함께 싸워가야 한다. 유성기업 10년의 투쟁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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