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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08.16 18:58

입만 열면 ‘청년 대표성’,

‘계급’은 어디에?

 

 

조형우┃학생위원회

 

 

 

36세 이준석이 국민의힘 대표에 당선된 이후,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수도 없이 ‘청년’을 호명하거나 온갖 유행에 편승하며 애써 ‘힙’함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 가운데 청와대 역시 이준석이 대표가 되고 불과 열흘 뒤인 6월 21일에 마치 맞불을 놓듯 25세 박성민을 청년비서관으로 임명했다. 국무총리 김부겸은 박성민 청년비서관 인선 배경에 대해 “이준석 대표의 탄생으로 발생한 정치권의 큰 변화 바람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청년의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겠나”라며 “아마 대통령 주변에도 그런 청년의 목소리를 바로 전달하는 창구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극한의 생존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청년들의 ‘무슨’ 목소리인지가 관건이다. 정치권에서 ‘청년팔이’는 너무나도 흔하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고려대 재학생 박성민을 비서관으로 임명하기 이틀 전인 6월 19일, 민주노총은 중대재해 사망사고에 대한 대통령 책임을 촉구하며 청와대 추모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이날 집회에서 경찰의 원천봉쇄로 충돌이 빚어졌고, 예정된 청와대 행진은 출발도 하지 못한 채 해산됐다. 이날 투쟁 과정에서는 경북 칠곡 쿠팡물류센터에서 일하다 과로사로 사망한 고(故) 장덕준 씨의 아버지가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부상을 입은 채 연행됐고, 어머니는 절규하다 잠시 실신하기까지 했다. 지난해 10월 장덕준 노동자가 숨졌을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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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19일 산재노동자 추모 행진을 경찰이 봉쇄하고 있다. 영정에는 산재로 목숨을 잃은 청년 노동자들도 포함돼 있다. [사진: 노동과세계(송승현)]

 

 

이렇듯 숨진 청년 노동자들을 추모하며 ‘일하다 죽지 않고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외친 목소리를 주말 동안 공권력으로 짓밟았던 청와대는 월요일이 되자 천연덕스럽게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변하기 위함’이라며 새 청년비서관을 임명했다. 대체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대변하겠다는 것인가?

 

 

청년의 목소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하다 죽어간 청년 노동자의 영정에 있고, 사람이 죽어도 달라지지 않는 청년들의 노동환경에 있다. 명문대 출신 청년이 다년간의 정당 활동 경력을 거쳐 제1야당 대표나 청와대 비서관이 된다고 해서 청년들의 목소리가 대변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나이로 ‘청년’인 사람이 얼마나 대표성 있는 자리를 더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가 노동자 특히 불안정‧비정규직 혹은 장기 취업준비생이 될 공산이 큰 노동계급 청년층의 분노와 요구를 누가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의 문제다.

 

 

과연 청년들은 이준석과 박성민이 자신들을 대변한다고 느낄까? 오히려 대다수에겐 그 반대일 것 같다. 일단 이준석은 혐오와 능력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며 청년의 목소리를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많은 청년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20대 여성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망상’이라며 음해하고,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을 정당화한다. 박성민의 경우, 청와대 비서관에 임명되자마자 ‘공정성’ 논란이 다시 튀어나왔다. ‘많은 수험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밤새워 공부하는데, 낙하산으로 1급 공무원이 됐다’는 류의 주장이다. 그러나 공무원 시험이라는 경쟁에 뛰어들 기회조차 누릴 수 없어 밤을 지새우며 일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논란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박탈감의 연속이다. 일부의 공허한 담론만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을 때, 대다수 청년의 고통은 심화하고 삶은 피폐해져 가고만 있다.

 

 

최근에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내에서도 청년이 여러모로 주요한 화두인 것 같다. 현대차그룹 사무연구직 노조처럼 근래 청년층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신생 노조,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 반발하는 청년 정규직 조합원, 민주노조운동이 보다 청년 친화적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표출 등 다양한 의미에서 ‘청년’이 오르내린다. 일례로 올해 청년사업실을 신설한 민주노총은 지난 노동절 전야에 ‘방송국 개국 이벤트’로 게임대회를 개최하고 수백만 원 상당의 상품을 지급하는 행사를 벌였다.

 

 

민주노조운동의 고령화로 인한 위기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보다 많은 청년노동자들의 지지와 참여를 끌어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청년 대표성을 강화하겠다고 청년들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청년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계급적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기존 민주노조운동이 ‘구시대적’이라 단정하고 겉으로 보이는 2030 세대의 정서와 문화에만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그동안 견지해왔던 최소한의 계급적 원칙을 훼손할 우려가 크다. ‘트렌디’한 겉보기 탈바꿈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청년노동자들의 삶을 바꿔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때만, 민주노조운동이 청년 미조직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정치권에서든 노동운동에서든, 청년의 대표성에 ‘계급’은 어디에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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