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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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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왜 ‘국가책임 일자리’인가 (1)

 

 

일자리 없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고근형┃서울

 

 

* 편집자: <변혁정치>는 고용 위기에 맞서 ‘국가책임 일자리’를 요구하는 이유와 변혁당의 대안을 제시하는 기획연재를 이번 호부터 진행한다. 이 글은 그 시작으로 우선 우리가 당면한 일자리 위기의 현실을 짚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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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사라지고,

내 삶도 사라졌다

 

바야흐로 ‘공채의 계절’ 9월. 그런데 공채는커녕 ‘고용’ 자체가 사라졌다. 국내 재벌로 구성된 대표적 자본가단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9월 6일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 하반기 상위 500개 대기업 10곳 중 7곳은 신규채용 계획이 없거나 정하지 못한 상태다. 이로부터 일주일 뒤인 9월 13일 한경연은 또 다른 설문조사 보도자료를 내놓았는데, 여기에서는 청년 10명 중 7명이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 조사에 참여한 청년들이 생각하는 ‘좋은 일자리’란 ‘연봉 3~4천만 원 정도의 일자리’라고 한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한경연이 자본가단체 전경련 산하 연구소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전경련 소속 기업들조차 자신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코로나19 장기화와 4차 대유행 확산’을 고용 축소의 ‘이유’로 꼽는다. 물론 코로나19의 악영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부터 실업난은 이미 만성적이었다. 생산액 10억 원당 창출되는 취업자 수를 나타낸 취업유발계수는 2000년 25.7명에서 2019년에는 10.1명으로 절반 넘게 감소했다. 즉,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도 민간 자본은 (‘일자리는 민간에서 창출한다’는 이데올로그들의 지겨운 주장과 달리) 이렇다 할 일자리 확대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식 실업자와 구직 단념자 등을 합한 실질 실업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2010년 293만 명이었던 실질실업자는 2019년엔 409만 명으로 100만 명 이상 증가했다. 참고로 이 수치는 2020년에는 492만 명으로 늘어, 전년 대비 80만 명(10년 전 대비 200만 명)이나 급증했다.

 

이런 지표는 신규채용은커녕 기존 일자리마저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위기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았다. 위기를 특히 정면에서 맞은 건 청년이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다. 당장 여성 노동자가 많은 돌봄‧가사‧음식‧소매업 등 대면서비스업이 무너졌다. 한국여성정책연구소에 따르면 돌봄‧가사노동자나 학습지 교사 등의 일자리는 코로나 유행 반년 만에 5만 9천 개 감소했고, 임금은 10.4% 하락했다. 더구나 ‘여성이기 때문에’ 잘리기도 한다. 코로나19 이후 직장을 잃은 여성노동자의 35~47%는 해당 ‘고용조정’을 ‘여성‧임산부 및 육아휴직자를 우선 대상으로 시행했다’고 답했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코로나19 1년간 20대 여성 4명 중 1명 퇴직 경험>, 2021년 3월 8일).

 

일자리를 잃는 것은 생계수단 상실인 동시에 사회와의 단절이다. 고용 급감은 삶의 파괴를 뜻한다. 이런 비극은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난다. 최근에는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우울과 불안, 자살 등 정신건강 위험군이 급증하고 있다. 국민정신건강조사에 따르면, 우울위험군과 자살 생각을 경험한 비율이 2018년 대비 2020년에는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된 건 ‘코로나19로 인한 고용 급감과 관계 단절’이다. 즉, 양질의 일자리는 ‘생계’ 차원을 넘어 인간다운 삶 자체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바로 그 인간다운 삶이 파괴되고 있다.

 

 

 

‘나쁜 일자리’ 양산 정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출범 초기 문재인 정부는 한때 ‘일자리 정부’를 자임했다. ‘공공부문 일자리 80만 개 창출’과 ‘비정규직 제로’가 골자였다. 촛불항쟁으로 표출된 대중적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자리 정부’의 실체가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가 만드는 일자리 대부분은 저임금‧단기직, 곧 ‘나쁜 일자리’였고(‘공공 일자리’), 노동기본권 박탈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광주형 일자리’를 비롯한 이른바 ‘상생형 일자리’), 일자리정책이 아닌 것을 ‘일자리정책’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한국판 뉴딜’).

 

먼저 공공부문 나쁜 일자리 양산부터 따져보자.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 창출’, 코로나19 이후 ‘일자리 154.3만 개 창출’, ‘90만 일자리 창출’ 등 고용 급감이 확인될 때마다 ‘공공 일자리’ 공급을 대책으로 제시했다. 문제는 정부가 내민 ‘공공 일자리’가 대개 저임금‧단기 일자리라는 점이다.

 

가령, 작년 5월 발표한 ‘공공 일자리 154.3만 개’는 이미 공급이 예정된 일자리 94.5만 개와 신규 공급 일자리 55만 개로 구분할 수 있다. 기 예정된 직접 공급 일자리 94.5만 개는 3~10개월짜리 계약직이며, 최저임금으로 주 15~40시간 일한다. 신규공급 일자리 55만 개는 더욱 심각한데, 근무기간은 6개월 내외로 한정된다. 이 가운데 ‘취약계층 공공 일자리’ 30만 개는 주 15~30시간 노동에 근무기간이 5개월 이내다. ‘비대면‧디지털 일자리’(10만 개) 역시 주 15~40시간 노동에 최대 5개월짜리 단기직이다. 즉, 월 30~180만 원에 3~10개월 일하고 끝나는 저임금‧비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지난 1월 취업자 수가 무려 100만 명이나 감소한 사실이 드러나자 정부는 다음 달 부랴부랴 ‘90만 직접 일자리 창출’을 제시했는데, 정부 스스로도 저임금‧단기 일자리임을 인정할 정도다.

 

한편, 문재인 정부는 4차 산업혁명과 기후위기, 고용 감소의 ‘대안’으로 ‘한국판 뉴딜’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데이터‧에너지 자본을 위시한 신산업 육성책일 뿐이다. 즉, 자본을 위한 산업정책에 ‘일자리정책’이라는 포장을 씌운 데 지나지 않는다. ‘한국판 뉴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른바 ‘데이터 뉴딜’의 골자는 D‧N‧A(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 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국비 32조 원을 투입해 ‘데이터 댐’ 등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일자리 태반은 데이터 입력 등 저임금‧단기 일자리다. 물론, 정보‧통신‧에너지 영역에서 얼마든 공공 책임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창출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임금 보장, 노동권 확대 등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양질의 공공 일자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은 저임금‧장시간‧불안정노동 체제의 연장일 뿐이다. 게다가 막대한 공적자금을 오직 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쏟아붓는다.

 

문재인 정부가 ‘상생형 일자리’라고 칭송한 것의 실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대표 사례가 얼마 전 현대차 ‘캐스퍼’를 출시한 광주형 일자리 공장, 즉 ‘광주글로벌모터스’다. ‘상생형 일자리 협약’의 면면을 보면, 자본의 투자를 대가로 지방 정부는 세금 혜택과 토지 등을 제공하는 한편 교통‧주택‧보육 등 인프라를 지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노동자들은 이른바 ‘적정 근로조건’이라는 미명하에 동종업계 대비 반값 임금으로 초과착취당해야 하며, ‘자유로운 전환배치’ 등 생산성‧노동유연화‧노동강도 상승에 더욱 종속됨은 물론이고, ‘파업 자제’나 ‘특정 시점까지 임금‧단체협상 유보’ 등 노동권 자체의 박탈까지 강요받는다. 지난 1월 산업은행이 위기에 처한 쌍용차에 대해 자본가와 경영진의 경영실패 책임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정책금융 지원 조건으로 ‘무쟁의와 단협 기간 확대’ 등을 대놓고 요구한 것 역시 ‘고용’을 노동권 박탈의 무기로 삼는 정부와 자본의 의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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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없는 ‘공정’,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저임금‧불안정 일자리가 확산한 결과, 양질의 일자리는 ‘공정한 시험’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특권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 반대를 시작으로 인천국제공항공사에 이어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갈등에서 드러나듯, 이른바 ‘공정성’ 논란의 가장 큰 축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다. 양질의 일자리가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누군가의 정규직 전환은 ‘내가 좋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빼앗는 행위’가 된 셈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외면 혹은 적대의 물질적 토대가 바로 고용 급감이다.

 

비단 비정규직만이 아니다. 여성이나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소수자 혐오에도 일자리 문제가 개입된다. 이를테면 지난 4월 재보선 이후 대두한 여성 징병제 주장이나 군 가산점 요구의 근거는,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남성은 군 복무로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여성 순경이 근무시간 중 주차 연습을 받았다는 이유로 또다시 ‘여경 폐지론’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알고 보니 성별과 무관하게 신임 순경 모두가 받는 일반적인 훈련이라는 게 드러났지만, 여경 폐지론이나 여성 순경 선발에서의 ‘역차별 논란’ 역시 유서가 깊다. ‘팔굽혀펴기 평가 기준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 차등이 너무 심하다’는 등이다. 물론 일자리 문제가 여성혐오의 전부는 아니지만, 주요한 토대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대중 앞에 별다른 대안이 제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양질의 일자리는 공정한 시험을 통해 선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정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나마 고용안정이 보장되는 게 공공부문 일자리고, 그 선발 기준은 주로 시험 점수다. 공공부문 채용 응시자가 크게 몰리면서 필기시험 난도가 지나치게 높다거나 직무 관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를 크게 문제 삼는 이는 많지 않다.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는 대단히 제한돼 있다’는 전제하에서는, ‘공정한 시험을 통과한 이에게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 이외의 주장이 나오기 어렵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양질의 일자리를 분배하는 유일한 기준이 ‘공정한 시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좋은 일자리를 얻는 방식과 기준을 넘어, 공공 차원에서 양질의 일자리 자체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대안을 제출해야 한다. 누구나 양질의 일자리를 얻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이를 현실화하는 투쟁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자리를 국가가 책임지고 제공하라’는 투쟁을 의미한다. 이런 양질의 일자리를 국가가 책임지기 위해서는 민간부문이 잠식한 돌봄‧가사 등 필수노동을 공공부문으로 전환하는 게 필요하며, 노동조건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도 필요하다. 에너지를 비롯한 산업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용불안에 관해서도 국‧공영화를 통해 일자리를 보장‧확대해야 한다.

 

 

 

필요하고 가능한

‘국가책임 일자리’

 

청와대에 걸려 있다는 ‘일자리 상황판’을 들여다보면, 2021년 2분기부터는 고용 상황이 개선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앞서 말한 저임금‧단기 일자리를 양산한 효과이지, 실제 체감 고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7월, 31살 청년이 원룸에서 이력서 150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자유주의자들은 실업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지만, 말마따나 ‘이 시국’에 일자리를 알아서 구하라는 건 죽음을 방관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책임 일자리 운동을 펼칠 조건은 이미 무르익었다. 안정된 일자리를 요구하는 주체의 목소리를 모아내고, 이를 진정한 ‘완전고용’ 쟁취로 이끌어갈 정치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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