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0 16:59
러일전쟁.1 기원과 개전 한길그레이트북스 163 | 양장본
와다 하루키 지음 | 이웅현 옮김 | 한길사 | 2019년 09월 23일 출간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인문 > 인문교양총서 > 한길그레이트북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이라 불리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의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책으로 전쟁사학의 결정판이다.
러일전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대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은 전쟁 직후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고 그때부터 국권 침탈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국민이 탄생했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간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비교하고 연구한 책은 없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이라 불리는 와다의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책으로 러일전쟁이 어떻게 기원하고 개전했는지 밝힌다.
와다는 러일전쟁의 성격을 ‘조선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한’ 일본이 러시아와 맞닥뜨려 전쟁으로 ‘몰아간’ 뒤 “조선을 일본의 것으로 한다는 점을 러시아로 하여금 인정하게 한 전쟁이었다”(36쪽)라고 정의한다. 그는 전쟁의 가장 큰 목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조선 전역을 식민지 지배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전쟁의 명칭은 ‘러일전쟁’이지만 전쟁의 본질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조선전쟁’이라는 것이다.
저자소개
저자 : 와다 하루키
저자가 속한 분야
인문/교육작가 > 역사학자
인문/교육작가 > 대학/대학원 교수
와다 하루키 와다 하루키는 1938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8년까지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교수 및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도쿄대학 명예교수, 도호쿠대학(東北大?) 동북아시아연구센터 펠로우(객원교수)다. 러시아사·소련사, 조선사·현대북한 등 동북아국제관계사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민주화운동일본연대회의(韓國民主化運動日本連帶會議)와 연대위원회(連帶委員會)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아시아여성기금 발기인, 운영심의회위원, 이사, 전무이사,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16년부터는 일조국교촉진국민협회(日朝國交促進?民協會) 이사 및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저서로는 『니콜라이 러셀: 국경을 초월한 나로드니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 『역사로서의 사회주의』(1994), 『한국전쟁』(1999), 『북조선』(2002),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2004), 『한일 100년사』(2015),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2013), 『북한 현대사』(2014), 『‘평화국가’의 탄생: 전후 일본의 원점과 변용』, 『스탈린 비판 1953-1956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2016), 『러시아혁명, 페트로그라드 1917년 2월』, 『아베 수상은 납치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등이 있다
와다 하루키님의 최근작
러일전쟁 2(한길그레이트북스 164)(양장본 HardCover)
동아시아 근현대통사(양장본 HardCover)
독도 문제는 일본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가(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ReadingJapan 18)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김대중과 한일관계(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구총서 1)(양장본 HardCover)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양장본 HardCover)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Reading Japan 3)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론
군대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시민운동
한국전쟁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창비교양문고 30)
역자 : 이웅현
저자가 속한 분야
정치/사회작가 > 정치/외교학자
고려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도쿄대학에서 러시아(소련)외교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지정학연구원 원장이다. 저서로는 『소련의 아프간 전쟁』(2001), 『중앙아시아의 문명과 반문명』(편저, 2007), 『동아시아 철도네트워크의 역사와 정치경제학 II』(편저, 2008), 『새로운 동북아 질서와 한반도의 미래』(공저, 2019)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일본인은 왜 사과를 잘 하는가?』(1991), 『평화와 전쟁』(1999), 『새로운 중세: 21세기의 세계시스템』(2000), 『러시아의 자본주의혁명』(공역, 2010)이 있다. 그 밖에 「아프가니스탄 반군의 계보」(2013), 「일본 문부과학성 교과서조사관의 계보」(2014), 「파키스탄의 격동과 파란: 동맹의 패러독스」(2015), 「1950년대 일본의 교과서 국정화 시도」(2016), 「전후 일본 보수인맥의 태동: ‘역코스’기를 중심으로」(2017) 등의 논문이 있다.
이웅현님의 최근작
러일전쟁 2(한길그레이트북스 164)(양장본 HardCover)
중앙아시아의 문명과 반문명(양장본 HardCover)
워싱턴의 사쿠라(반양장)
평화와 전쟁(2판)
소련의 아프간 전쟁
새로운 중세(21세기의 세계시스템)
헝가리 침공과 흐루시초프
일본인은 왜 사과를 잘하는가
일본인과 미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목차
러일전쟁 1
기원과 개전
17 ㆍ 러일전쟁 주요 인물들
35 ㆍ 한국과 북한의 독자들에게 | 와다 하루키
39 ㆍ 와다 하루키 전쟁사학(戰爭史學)의 위용 | 이웅현
제1장 러일전쟁은 왜 일어났는가ㆍ
53 ㆍ 시바 료타로(司馬遼太ㆍ)의 견해
61 ㆍ 『고무라 외교사』(小村外交史)와 『기밀 일러전사』(機密日露ㆍ史)
63 ㆍ 비테의 『회고록』을 둘러싼 상황
69 ㆍ 전쟁 체험기의 산(山)
71 ㆍ 러시아군 공식 전사와 시만스키 조서(調書)
74 ㆍ 일본의 공식 전사와 비밀 전사
76 ㆍ 러시아 혁명 후의 연구
83 ㆍ 구미와 한국에서의 연구
86 ㆍ 일본의 연구
91 ㆍ 나의 러일전쟁 연구 역정(歷程)
제2장 근대 초기의 일본과 러시아
105 ㆍ 막말유신(幕末維新) 전야의 일본과 러시아
109 ㆍ 메이지유신과 러시아
111 ㆍ 사할린 문제
115 ㆍ 조선에 대한 일본의 관심과 러시아
119 ㆍ 러시아 황제 암살과 조선의 군란
123 ㆍ 일본의 러시아경계론
127 ㆍ 러시아에 대한 고종의 기대
136 ㆍ 일본 정부의 격렬한 반응
140 ㆍ 고종의 대러 접근 제2막
149 ㆍ 메이지 초기의 일본과 러시아
150 ㆍ 일본 제국헌법 제정과 러시아
153 ㆍ 비테의 등장과 시베리아철도 구상
155 ㆍ 러시아 황태자의 세계일주 여행
156 ㆍ 제국의회 개회일의 불상사
162 ㆍ 러시아 황태자의 일본 도착
166 ㆍ 오쓰사건(大津事件)
173 ㆍ 시베리아철도 착공
181 ㆍ 노불동맹(露佛同盟)의 성립
제3장 청일전쟁과 전후 일본ㆍ조선ㆍ러시아 관계
195 ㆍ 주재 무관 보가크와 동학농민운동
197 ㆍ 일본의 조선 출병 결정
201 ㆍ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
202 ㆍ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러시아
205 ㆍ 일본군의 서울 점령
207 ㆍ 러시아 정부의 제안에 대한 반응
209 ㆍ 러시아, 일본 정부의 회답을 받다
211 ㆍ 조선 정부에 대한 일본의 요구
214 ㆍ 7월 23일 사변ㆍ조선전쟁의 개시
219 ㆍ 러시아인의 관찰
222 ㆍ 조선전쟁에서 청일전쟁으로
227 ㆍ 일본의 조선 취급 방침
231 ㆍ 개전과 러시아
233 ㆍ 보가크의 첫 인상과 평양 대회전(大會戰)
237 ㆍ 보가크의 일본군 종군 관찰
240 ㆍ 이노우에 공사의 개혁 지도
244 ㆍ 러시아 황제의 죽음과 신 황제 니콜라이
246 ㆍ 새로운 외무장관
248 ㆍ 전쟁의 종장을 둘러싼 움직임
250 ㆍ 전투의 종결
252 ㆍ 전쟁 종결의 조건
256 ㆍ 강화 교섭과 러시아
260 ㆍ 간섭을 위한 장관 협의
265 ㆍ 러시아 해군, 즈푸에 집결하다
267 ㆍ 삼국간섭
272 ㆍ 조선 정부와 이노우에 공사
275 ㆍ 주둔군 문제와 조선 정부의 위기
279 ㆍ 베베르와 히트로보의 견해
282 ㆍ 미우라(三浦) 공사의 등장
285 ㆍ 이노우에 공사의 귀임
287 ㆍ 미우라 공사 도착
291 ㆍ 민비 살해
293 ㆍ 살해의 목격자들
295 ㆍ 대원군과 신정부의 성립
296 ㆍ 러시아 공사의 추궁
298 ㆍ 일본 국내의 반응
300 ㆍ 고무라 조사단의 사건 처리
305 ㆍ 랴오둥반도 반환조약의 조인과 러ㆍ청 접근
307 ㆍ 11월 28일 사건
309 ㆍ 일본과 러시아의 군비증강 계획
311 ㆍ 러시아 군부의 청일전쟁 연구
314 ㆍ 러시아 지식인과 청일전쟁
제4장 러시아의 뤼순 점령과 조차(1896-99)
337 ㆍ 고종의 아관파천
341 ㆍ 일본이 받은 충격
343 ㆍ 페테르부르크와 도쿄에서의 교섭
346 ㆍ 야마가타의 러시아 방문 구상
350 ㆍ 고무라-베베르 각서 조인
353 ㆍ 러ㆍ청 비밀동맹조약과 동청철도협정
357 ㆍ 러시아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360 ㆍ 대관식과 그 후의 교섭
364 ㆍ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 조인
367 ㆍ 조선 사절의 교섭
368 ㆍ 러시아인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파견 문제
370 ㆍ 해군상의 경질, 외상의 죽음
372 ㆍ 보스포루스 해협 점령 문제
376 ㆍ 고종의 환궁
377 ㆍ 무라비요프 외상의 등장
378 ㆍ 러시아 군사교관의 활동
380 ㆍ 새로운 주일 공사 로젠 발령
382 ㆍ 군사교관의 증파와 베베르의 이한(離韓)
385 ㆍ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국장(國葬)
386 ㆍ 러시아인 재정고문의 파견
387 ㆍ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점령과 러시아
394 ㆍ 러시아 분함대(分艦隊), 뤼순으로
396 ㆍ 러시아 함대의 뤼순 입항
399 ㆍ 비테의 기회
400 ㆍ 쿠로파트킨 육군상의 등장
404 ㆍ 러ㆍ일 신협정을 요구하는 움직임
407 ㆍ 한국에서 반러시아 운동이 일어나다
409 ㆍ 로젠 의견서
411 ㆍ 러시아, 랴오둥반도를 조차하다
415 ㆍ 한국 정세의 급변
417 ㆍ 니시-로젠 의정서
421 ㆍ 요동치는 한국
425 ㆍ 주한 공사의 교대
426 ㆍ 헤이그 평화회의
434 ㆍ 마산 문제
439 ㆍ 관둥주(關東州)의 시작
443 ㆍ 주일 육해군 무관들
448 ㆍ 조선 임업이권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453 ㆍ 조선 북부로의 조사대 파견
454 ㆍ 베조브라조프의 동아시아회사
459 ㆍ 무라비요프의 20세기 외교방침
461 ㆍ 쿠로파트킨의 대(大)상주보고
463 ㆍ 1900년 해군대학 춘계 도상(圖上)훈련
제5장 의화단(義和團)사건과 러청(露淸)전쟁
485 ㆍ 의화단사건
491 ㆍ 톈진 전투
492 ㆍ 러청전쟁의 개시
495 ㆍ 블라고베셴스크의 전투와 학살
502 ㆍ 쿠로파트킨과 람스도르프
505 ㆍ 러청전쟁은 계속되다
506 ㆍ 잉커우 제압과 베이징 점령
508 ㆍ 러시아 정부의 결단
510 ㆍ 러청전쟁의 마지막 국면
512 ㆍ 의화단사건과 조선, 일본
515 ㆍ 조선을 보는 러시아의 눈
519 ㆍ 한일공수(攻守)동맹
522 ㆍ 한국중립국안의 등장
525 ㆍ 국민동맹회와 여섯 교수의 건의서
527 ㆍ 계속되는 한국 대표의 노력
531 ㆍ 러시아 정부의 방침과 고무라 공사
535 ㆍ 러청밀약 체결
539 ㆍ 황제, 티푸스를 앓다
540 ㆍ 영독협정의 조인
541 ㆍ 러청밀약의 파문
543 ㆍ 이즈볼스키의 한국중립화 구상 추진
553 ㆍ 러청교섭
558 ㆍ 반러시아론 고조
561 ㆍ 러시아 정부, 러청협정 체결을 단념하다
563 ㆍ 계속되는 전쟁의 공포
568 ㆍ 가쓰라 내각의 성립
569 ㆍ 참모총장 사하로프의 모반(謀反)
577 ㆍ 황녀의 탄생과 닥터 필리프
579 ㆍ 베조브라조프의 그림자
581 ㆍ 위기가 표면화하는 제국
583 ㆍ 일본의 러시아관
588 ㆍ 구리노 러시아주재 공사의 인사 문제
592 ㆍ 영일동맹 교섭
596 ㆍ 페테르부르크의 이토 히로부미
600 ㆍ 영일동맹의 체결을 위하여
604 ㆍ 람스도르프의 회답 만들기
607 ㆍ 영일동맹조약의 조인
608 ㆍ 러불선언
610 ㆍ 러시아, 만주철군협정을 체결하다
612 ㆍ 이즈볼스키 최후의 한국중립화안
615 ㆍ 구리노의 러ㆍ일 협상안
619 ㆍ 로젠과 파블로프의 의견
626 ㆍ 한국중립화안에 대한 일본의 반응
628 ㆍ 비테의 극동 시찰
633 ㆍ 베조브라조프의 극동 파견
653 ㆍ 찾아보기
책 속으로
■ 민비 살해의 참극을 목격하고 증언을 남긴 러시아인이 있다. 세레진-사바친이다. 그는 1883년에 상하이에서 조선으로 임시 고용되어 온 외국인이었는데, 마지막에는 건축가로서 고종을 위해 일했다. 1888년에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건청궁 안에 2층짜리 양옥인 관문각(觀文閣)을 건축했다. 인천의 만국공원 안에 있는 제물포 클럽의 건축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문 『달료키이 크라이』(Далёкий край)에 익명으로 조선으로부터의 통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세레진-사바친은 건청궁 내의 국왕과 왕비의 거실로 통하는 문에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평복을 한 여러 명의 일본인을 보았다. 그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왕비의 거실이 있는 구내는 일본인들로 꽉 찼다. 20명 내지 25명 정도였다. 그들은 평복차림이었고, 칼도 지니고 있었다. 일부는 칼을 빼들고 있었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던 것은 긴 칼을 지닌 일본인이었다. 아마 그들의 대장이었을 것이다. 일부 일본인들은 궁전 구석구석까지, 또 다른 건물 내부도 분주하게 찾고 있었다. 다른 자들은 왕비의 방에 난입해 거기 있던 궁녀들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잡고 창에서 끌어내 떨어트려서는 땅에 질질 끌고 가면서 무언가 추궁했다.” “나는 원래 장소에 머물면서, 일본인들이 왕비의 어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일본인이 한명의 궁녀를 잡아채어 집 안에서 끌어내 계단 아래로 질질 끌고 내려갔다.” 293-294쪽
■ 보가크는 1895년 이전 극동에 존재하는 유일한 주재 무관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관찰해야 하는 대상에는 청국, 일본, 조선이 포함되어 있었다. 톈진에서 그가 보낸 보고 가운데 최초로 공표된 것은 1893년 5월 28일(16일)자의 보고였다.
“현지에서 수취한 최초의 정보에 따르면 [동학농민] 운동은 주로 선교사 특히 미국인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신 정보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조선의 쟁란은 훨씬 더 넓은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문제의 소요는 이미 금년 초에 서울에서 감지되었다. 나중에 분명해진 바에 의하면 이는 동학당이라는 결사(結社)를 필두로 한 몇 개인가의 비밀결사의 소행이었다. 동학당은 불과 4, 50년 전에 창립되었을 뿐이지만, 회원은 이미 20만 명 가까이에 달한다.
보가크는 일본의 움직임에도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1880년대 중반에 조선을 병탄하려는 기세였지만 청국의 개입으로 톈진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의 움직임에는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진출은 멈출 줄을 몰랐고, 이 분야에서 방곡령사건(防穀令事件)이 발생, 일본의 보상요구로 조?일 사이에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일본에서는 의회의 다수파와 유력 신문들 모두가 정부의 대 조선 정책이 저자세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일소하라고 요구하며, 러시아에 대해서는 “북쪽에서 밀고 내려와 조선 왕국을 병탄하려고 준비하는 허수아비이자적”이라고 보고 있다.
발생한 소요사건에 대해서 조선 정부는 “고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탄압할 힘이 없기 때문에 청국의 리훙장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보가크는 입수된 정보만으로는 아무것도 결론 지어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본질적으로 이 모든 사정은, 어느 정도
악화된다면 조선문제의 발생, 보다 정확히 말해서 조선문제의 재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라는 점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가크의 분석은 선견지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1894년 초부터 동학농민운동은 본격화했고, 조선문제는 정말로 전 극동, 동북아시아의 초점이 되어갔다. 196-197쪽
■ 무쓰 무네미쓰 외상은 조선은 “청국이 하는 대로 맡겨둘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다면서, 청국이 출병한다면 일본 역시 톈진조약에 기초해 상당수의 병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2일 참모총장과 차장의 출석을 요구하며 소집된 각의는 무쓰 외상의 제안을 듣고 공사관과 거류 일본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조선에 출병할 것을 결정했다. 조선 정부에게서 받은 요청이 전혀 없었는데도, 조선의 요청으로 청국이 출병하는 사태에 대항해 조선에 군대를 투입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각의 결정이 내려지기 하루 전날 저녁,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이 외무성으로 무쓰 대신을 찾아왔다. 여기에 배석한 차관 하야시 다다스(林董)의 회고에 의하면 “15년[임오군란]?17년[갑신정변]에 뒤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다. 아산의 청국 병사는 많게 잡아 5,000명 정도 될 것이다. ……우리의 출병 소식을 듣게 되면 필경 그들이 먼저 습격해 올 것이다. 그때 필승을 기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6,000~7,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선 혼성여단을 보내면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어떻게 싸움을 일으키고, 어떻게 이길 것인가 하는 것을 상의했다.” 이 회고에는 의문점도 있다. 6월 1일에는 청국 병사들이 아직 아산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외무성과 군부가 출병이라는 핵심 내용을 결정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1882년의 임오군란 시에는 1개 대대 500명, 1884년의 갑신정변 시에는 2개 대대 1,000명을 투입했다. 이번에는 혼성 1개 여단 8,000명의 투입을 고려했다. 이는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었고, 완전히 전쟁을 하겠다는 자세였다. 197-198쪽 닫기
출판사 서평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2,402개의 각주를 넣을 만큼 철저하게 고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재구성한 서사극(敍事劇)이다. 또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역사의 지류가 ‘어떻게’ 러일전쟁으로 흘러가게 되었는지 밝힌다. 러시아, 일본, 조선, 중국,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그리고 태국 등 9개국에서 700여 명에 이르는 인물이 등장해 사실관계를 고증한다.
와다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을 샅샅이 훑는다. 이를 통해 1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따로 떼어 해석할 수 없으며 이 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단일 범죄임을 밝혀낸다. 청일전쟁을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을 ‘제2차 조선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다. 와다는 이 두 차례의 조선전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비극의 출발점이며 오늘날 일본의 뿌리를 볼 수 있는 전쟁으로 일본은 이를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일본이 전쟁을 기획, 모의하고 마침내 실행하는 현장을 마치 동영상을 틀어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다. 이제까지 밝혀진 것과 달리 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했고 일본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범죄였다는 증거를 장장 1,300여 쪽에 걸쳐 입증한다. 전쟁으로 몰아가던 군국주의 시대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는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이성적 판단이 결핍된 야만의 시대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법정에 울려 퍼지는, 예리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가득 찬 이 대작은 전범(戰犯)을 겨눈 논고의 전범(典範)이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영내에 침입해 진해만, 부산, 마산, 인천, 서울, 평양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사실상 보호국화(保護國化)를 강요하는 의정서에 조인하게 했다. 일본은 우선 조선을 자국의 보호국으로 삼은 뒤, 러시아로 하여금 그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쟁을 추진했다. 러일전쟁의 가장 큰 목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조선 전역을 식민지 지배하는 것이었다.”_1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