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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9.01 18:20

반복되는 성폭력, 

누가 그에게 권력을 주었는가


예진┃사회운동위원회 여성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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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은 여전히, 어디에나


7월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망했다. 지난 8일 서울시 직원이 그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지 하루 만의 일이다.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이후 선택한 죽음, 많은 이들이 그 죽음을 추모했다. 장례는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졌고, 내로라하는 정치계 인사들이 줄지어 빈소를 찾았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박원순의 죽음에 성추행 사건을 거론하는 것이 “예의 없는 행동”이라며 화를 냈다.


죽음 앞에 폭력이 지워졌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난무했다. 박원순의 죽음에 대해 피해자의 책임을 묻고 신상을 파헤쳤다. 피해자의 사진이라며 누군가의 사진을 온라인상에 게시하고, 피해자의 동의 없이 고소장을 유포했다. 박원순 성폭력 고소 사실이 공개된 이후,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했다. 세상은 피해자와 그를 지지하는 여성단체 등을 비난하며 가해자를 옹호했다.


정치권의 성폭력 고발은 처음이 아니다. 안희정, 오거돈, 최근 부산시의원까지, 남성 정치인의 성폭력 사건이 지속해서 폭로됐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서사와 업적에 귀 기울인다. ‘정치인에 대한 존경’을 빙자한 2차 가해 속에서 피해자는 ‘생존’하고 있다.


비단 정치권뿐일까. 권력자에 의한 성폭력 외에도 일상적으로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범죄가 발생한다. N번방 사건을 보자. 텔레그램(메신저 앱)으로 아동‧청소년에게 성 착취 영상을 찍도록 강요하고 이를 거래한 가해자가 26만 명이다. 성폭력을 전시하며 남성들만의 카르텔을 또다시 세워낸 이들은 대부분 10~30대 남성이었다. 주동자 몇 명의 신상과 얼굴이 공개되며 우리는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해자는 악마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 주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상은 성폭력을 용인한 성차별적 사회 구조와 여성 억압적 구조를 마주하고도 변하지 않았다. ‘버닝썬’은 묻혔고, 세계 최대의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는 풀려났다. 성장 과정, 정서적‧경제적 어려움, 범죄 전력, 부양가족…. 사법부는 수많은 이유를 들이대며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다. 성폭력 사건은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오늘도 여전히 성폭력은 우리 주위에 있다.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 

그 폭력의 역사


개인의 잘못이라기에는 가해자가 너무 많다. 도대체 성폭력 사건은 왜 발생할까? 여성의 성은 왜 억압의 대상이 됐을까? 그 시작을 돌아보고자 한다.


농경사회에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 ‘생산하는 사람’과 ‘생산물을 통제하는 사람’이 구분됐고, 계급 구조가 뚜렷해졌다. 더 많은 잉여생산물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여성의 역할은 임신‧출산 등 재생산 영역에 국한됐다. 점차 생산 영역에 대한 통제권은 남성에게 부여됐고, 이는 가정에서의 지위로 이어졌다. 사유재산 개념이 강화되며 사유재산을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여성의 몸, 성과 섹슈얼리티는 통제되기 시작했다.


남성 중심의 국가는 여성에게만 ‘정조에 관한 죄’를 물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허락’되지만, 그 외의 성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여성의 성에 이중적 잣대를 들이밀며 ‘성녀’와 ‘창녀’를 구분했다. 성적으로 만족시켜줄 여성을 분리하고 타락‧문란한 것으로 여겼다.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몸을 통제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됐다. 정절을 규범화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몸을 억압하고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활용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지배계급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제도라는 사회 구조를 필요로 했다. 자본주의적 산업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개별 가정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급자족을 욕망하길 바랐다. 여성에게는 재산이나 소득의 권리를 주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가족제도를 강화하며 부르주아지의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권리가 박탈된 가족제도는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핵심이었다. 이미 여성의 몸은 필요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고, 이러한 사회에서 성적 폭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성폭력을 용인하는 ‘가해자 왕국’ 속에서 

거래되는 여성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폭력이 산업으로 발전했다. 성매매와 포르노는 물론이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조차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며 성장했다. 1년 전 벌어진 일본 제품 불매운동 과정에서도 일본 포르노 소비는 줄지 않았다. 포르노는 강간을 섹스로 미화하고, 여성의 몸을 절단하거나 결박하며 모욕적인 고통을 주는 것을 성적으로 소비한다. 남성의 쾌락을 위해 여성의 육체를 대상화하는 섹스는 현실에서 재현되며 여성 억압적 사회를 재생산한다. 포르노를 보는 것에서 나아가 불법 촬영을 행하고 이를 공유하기도 한다. 끔찍하게도 영유아까지 그 피해자가 되고 있다.


성매매는 어떠한가? 이는 이미 거대한 성 산업 속에 존재한다. 이전에는 국가가 앞장서 성매매를 장려하고 외화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기지촌을 계획도시처럼 조성하고, 달러를 벌어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다며 애국자라 칭송했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성병 치료를 이유로 들어 ‘기지촌 여성’을 감금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하는 이들도 많았다. 오늘날에도 성을 사는 사람보다 판매하는 사람에 대한 낙인이 거세다. 남성 문화 안에서 성 매수는 경험으로 공공연하게 공유된다. 그러나 성 판매자는 사회적 비난으로 성폭력 피해조차 말하기 어렵다. 일상적으로 성관계 중 콘돔을 몰래 빼는 ‘스텔싱’을 겪고, 성병이나 에이즈에 노출되는 이들의 삶은 누구도 보호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성폭력과 성매매 단속과정에서의 인권침해와 여성의 빈곤 문제는 가려진다.


성폭력적 사회는 사람들이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미디어에서도 재현된다. 강간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문화로 소비된다. 데이트 폭력을 ‘사랑’으로 포장하며 가해자의 서사를 그리는 드라마는 수도 없이 많다. 게임에서도 여성은 성적으로 소비된다. 게임 속 여성 캐릭터는 선정적으로 그려지고, 심지어 자신의 ‘취향’에 맞게 신체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 광고가 버젓이 걸린다. 아이돌 산업도 마찬가지다. 교복을 입힌 청소년 아이돌에게 섹시 컨셉을 찾고, 성인 여성 아이돌에게 애교를 강요한다. 인터넷 방송에서 여성 BJ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송으로 인기를 얻는다. 이 모든 것은 여성의 성이 효과적인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회에서 성폭력이 성장했다. 국가는 성폭력에 관용을 베풀며 용인한다. 앞서 언급했던 버닝썬과 손정우 외에도, 수많은 가해자가 국가로부터 자유를 인정받고 사회에 나와 있다. 가해자의 ‘사정’을 이해해주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성폭력 사건에 관대한 처벌을 보이는 국가가 ‘가해자 왕국’을 건설했다. 남성 중심적 사회를 구성하는 악순환이 멈추지 않는다면, 내일도 모레도 수많은 여성이 성폭력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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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페미니스트 그룹 "라스 테시스 Las Tesis"의 <강간범은 당신> 퍼포먼스. [유튜브 화면 캡쳐]



성폭력적 사회구조의 균열을 위해


성적 폭력이 사적으로 행해질지라도,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해자의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성폭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가해자 개인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성폭력은 생물학적 힘의 차이나 성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발생한다. ‘때리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때릴 수 있어서’ 때리는 것처럼, 자신의 지위나 성별 권력을 통해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성폭력을 행하는 것이다. 이를 용인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성은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


성폭력은 대학과 직장 등 모든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먼저, 폭력을 폭력이라고 말하자. 가해자의 학창 시절이나 업적을 근거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방어하지 말고, 폭력을 말해야 한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추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목소리를 먼저, 더 크게 듣자. 동시에 일상적 성폭력이 성폭력적 사회구조와 연결돼 있음을 밝혀야 한다. 나의 공간에서부터 반(反)성폭력 운동을 실천하고, 성폭력 규정을 바꾸기 위한 강간죄 개정 등 제도 개선 요구도 이어가자.


나아가, 여성의 새로운 성적 권리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성을 규제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보호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여성의 성적 권리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자. 이와 함께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고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자. 착잡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지금,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호소를 지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침묵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피해자의 곁에 있음을 드러내자. 일상적 문화를 바꾸고, 자본이 여성을 활용하는 것을 거부하며 성폭력이 없는 사회를 위해 함께 싸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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