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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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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이션 논란,

한국은 일본 장기불황을 따라가는가?


김정주┃충남대(경제학)



경제학에서 인플레이션inflation은 일반적으로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반대로 디플레이션deflation은 물가 상승이 더디거나 오히려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뜻한다. 언뜻 생각하면 물가가 상승하지 않고 오히려 하락하기까지 하니 경제가 디플레이션 상황에 있으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에 디플레이션이 나타난다는 건 상품가격은 물론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가격, 그리고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 등 경제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가격이 정체하거나 하락한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그러한 경제는 곧 안 팔리는 상품, 안 팔리는 주택과 아파트, 천덕꾸러기가 된 기업의 주식, 그리고 고용되지 못한 채 실업 상태에 있는 노동력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 과잉상태의 경제를 뜻한다. 이처럼 모든 교환과 거래가 멈춘 듯 활력을 잃은 채 디플레이션에 빠진 경제는 당연히 우리의 삶을 훨씬 더 힘들게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디플레이션은 심각한 경기후퇴가 나타나거나 혹은 경제시스템 자체가 붕괴하는 공황기에 주로 관찰됐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나타난 미국경제에서의 디플레이션과 세계경제의 장기침체, 그리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며 1990년대 이후 지속된 일본경제의 장기침체 국면이다.


이 가운데 특히 일본경제의 장기침체와 디플레이션은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온갖 정책적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20년이 넘도록 한 나라의 경제가 디플레이션과 장기침체 국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경우는 300여 년 자본주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매우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단 한 번 활력을 잃어버린 뒤 디플레이션에 빠진 경제를 되살려내는 일이 여간해선 쉽지 않음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일본은 왜 추락했는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경제의 활력을 찾기 위해 그간 일본 정부는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거의 모든 정책적 수단을 동원했다. 일본 중앙은행은 기업 투자와 소비심리를 자극하려고 하늘에서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 매년 엄청난 양의 돈을 공급했다. 최근 일본 중앙은행은 경제회복을 위해 매년 80조 엔씩 돈을 뿌릴 준비가 돼 있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경제가 극심한 불황기일 땐 아무리 주머니에 돈을 채워줘도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를 대비해 그 돈을 가지고 있으려 할 뿐 중앙은행이 기대하는 만큼 소비에 지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과감히 돈을 써서 부족한 총수요를 끌어올려야 한다. 이처럼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치는 대로 지난 20년간 일본 정부는 매년 빚을 내 총수요를 끌어올리려고 엄청난 돈을 지출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GDP의 두 배가 넘는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됐다. 하지만 정부 부채에 대한 걱정과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부는 일본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2% 물가상승률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확장적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고수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본경제의 장기침체를 촉발한 ‘역사적’ 계기는 엔화의 인위적 평가절상을 가져온 1985년의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였다.* 엔화의 급격한 평가절상은 대표적인 수출주도형 경제로 꼽히던 일본에 큰 타격을 가했다. 이 무렵 일본의 주요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국내 생산설비를 해외로 이전해 엔화의 평가절상에 따른 가격경쟁력 상실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결국 일본 기업들은 1990년대 이후 해외 생산설비를 활용한 글로벌 생산네트워크를 갖춰 급격한 환율변동이 가져온 수익성의 위기를 견뎌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기업의 성장이 더 이상 국내 투자와 고용을 자극하지 못하면서 일본경제는 심각한 내수 침체에 직면했다. 명목임금의 증가가 노동생산성 증가에도 미치지 못하거나 오히려 감소하는 임금의 억압상태가 나타나 소비기반은 더욱 위축됐다. 이 상황에서 1990년대 초반의 자산시장 버블 붕괴는 일본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격은 최고점 대비 1/3 수준까지 폭락했으며, 임금의 억압상태와 더불어 버블 붕괴가 가져온 이 같은 대규모 자산손실은 일본경제의 소비기반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붕괴시켰다.


성장은 하지만 더 이상 국내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 정체하거나 감소하는 임금, 늘어나지도 않으면서 불안정해지기만 하는 일자리, 1/3 수준으로 쪼그라든 자산 등 일본경제에 구조화된 ‘축소 지향성’은 마침내 출산이라는 원초적 욕구마저 억눌러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저출산-고령화 국가로 변모시켰다.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는 가장 원초적 생산요소인 노동력의 감소를 초래해 일본경제의 잠재성장률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전망의 확산은 내수를 지탱하는 소비기반 자체를 더욱 위축시켜 경제의 ‘축소 지향성’을 한층 강화하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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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따라가는 한국


최근 한국에서도 과거에 비해 물가상승률이 두드러지게 둔화하자 ‘일본 같은 디플레이션 경제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수입 물가 하락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고 설명하지만, 물가상승률이 1%대를 넘지 못하는 저물가 기조는 이미 2010년대 들어 장기간 지속하며 굳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일시적 현상으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 드디어 올해는 물가상승률이 1%에도 못 미치는 0.5%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한층 더 커지고 있다.


실제로 2010년 이후 한국경제의 여러 지표가 보여주는 추세는 장기침체에 빠질 무렵의 일본경제와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다. 2010년 이후 한국경제의 투자율과 소비증가율은 빠르게 하락했다. 이는 곧 내수 기반 자체가 그만큼 위축됐음을 의미한다. 더욱 큰 문제는 2010년 이후 제조업 평균 가동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는 점이다. 2010년 80%였던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계속 감소해 2018년엔 72%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는 곧 생산에 활용되지 못하는 유휴 생산설비가 늘어났고 그만큼 한국경제의 활력이 쇠퇴했음을 뜻한다.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줄지 않으면서 임금도 정체했다. 생산설비 해외 이전으로 글로벌 생산네트워크를 갖춘 수출 대기업의 실적은 사상 최고치를 줄곧 갱신했지만, 대기업의 성장은 더 이상 그만큼의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않고 있다. 어찌 됐든 경제는 성장하지만 성장률 자체는 계속 하락했으며, 일본보다 빠른 속도로 저출산-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몇 년 내 잠재성장률은 3% 이하로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즉, 한국경제는 앞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3%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저성장 경제로 가고 있다.


이쯤 되면 미국이 강요한 환율의 급격한 평가절상과 자산시장 버블 붕괴가 나타나지 않았다뿐이지, 지금 한국경제의 모습은 ‘잃어버린 20년’으로 진입하던 일본경제와 판박이처럼 흡사하다. 하지만 환율의 문제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 미국에서 보호무역주의의 강화와 중국이 추구하는 수입 대체화 전략은 수출주도형인 한국경제의 미래가 결코 과거처럼 낙관적이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 대다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부동산 시장의 거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한국경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이제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


일본경제와 한국경제의 공통적 불행은 결국 글로벌 시장을 활용할 능력을 갖춘 기업의 성장이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과는 무관한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재벌 같은 대기업은 성장하고 국가는 부자가 되었으되 국민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이 역설을 해결하지 않는 한, 역동성과 활력을 잃고 디플레이션에 빠져버린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20년’은 조만간 닥칠 한국경제의 미래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의 한국경제가 반드시 과거처럼 10%의 성장을 구가하던 고성장 경제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필요한 성장률을 선택하는 것과, 누구도 원치 않는 구조적인 조건들 속에서 저성장의 경제로 침몰해 가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일본 아베 정부 식으로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무제한적인 확장적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과감한 구조 개혁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마음껏 낳고 기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껏 경제학은 이처럼 소박하지만 절박한 질문을 잊은 채 성장만을 추구해왔기에, 어쩌면 한국경제에 당면한 위기적 징후들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경제학이란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 플라자 합의는 미국의 패권이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엄청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달러 대비 가치를 강제로 끌어올려 미국으로 수입되는 일본과 독일 상품의 달러 표시 가격을 인상함으로써 무역적자를 낮추려고 했다.



* 오늘도 맑습니다누구나 위기를 말하는 지금, 우리에겐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 맑스 경제학을 바탕으로 현실 경제를 풀이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지면은 “무엇을 할지 묻는다면 레닌” 코너와 교차로 월 1회씩 연재를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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