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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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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위한

맞춤 교육영상의 재미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가끔 처음으로 하는 요리인데도 너무 맛있게 될 때가 있다. 그 후 다시 그 요리를 하면 영 그 맛이 안 난다. 고스톱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대강의 룰만 알고 처음 고스톱을 했는데 꽤 해본 사람들의 돈을 다 딴다. 재미가 붙어 다음 판에 붙어보면, 판돈을 탈탈 털리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처음으로 하기 때문에 더 긴장해서 그런가. 처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뭘 몰라서 더 용감해지기 때문일까. 하여간 민주노총 건설의 열풍에 노뉴단이 한참 시달리던 와중에 만든 <노동자의 법>*에서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했다. 의도치 않았는데 교육영상 제작에 관한 중요한 방법론을 경험했다.

 

전국노동자에게 필요한 어떤 것에서

○○노동자에게 필요한 특별한 ○○으로

드디어 단위 사업장에서 그 사업장만의 조합원을 위해, 말하자면 ○○조합원용 영상교육물의 제작을 의뢰했다. <노동자뉴스> 첫 상영이 있고부터 6년여 만에 일이다. 발단은 기아자동차의 젊은 활동가가 노조 교육실장으로 오면서 시작됐다. 의욕에 찬 젊은 교육실장은 단협에서 따낸 조합원 교육시간을 조합원 의식화 시간으로 제대로 활용하고 싶어 했다. 하루 4~6시간씩 매일 몇 달을 해야 하는 조합원 교육에 교육위원들의 노고도 덜어주고, 수천 명의 조합원에게 정리된 하나의 노동자 시각을 갖게 해주고 싶어 했다.

지금이야, 한 노조의 교육실장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생각이지만, 당시 우리는 상당히 놀랐다. 그때까지 영상은 , 전노협, 민주노총건설준비위 등과 같은 전국조직에서 만들어 단위 사업장에 배포하는 방식이 전부였다. 전국노동자를 대상으로 전국조직이 만드는 영상! 이렇게 해서 나온 우리의 작품은 서로 옷을 다르게 입고 있지만, ‘전국의 노동자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라는 하나의 집에서 나왔다. 이 집은 작품의 소재와 주제, 그리고 형식을 지배해 온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이 무기로 우리는 ‘87년 이후의 노동자투쟁 역사’, ‘올해의 투쟁과제 혹은 조직과제’, 이런 식으로 노동자라면 누가 봐도 쓸모 있을 것 같은 소재로 큰 주제를 말하고 그것에 준하는 형식을 구사해왔다. 이것이 매우 관습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른바 맞춤형 영상교육물 <노동자의 법> 작업을 통해 알게 됐다. ‘전국의 노동자에게 필요한 어떤 것은 어떤 노동자에게나 필요한 보편적인 힘은 있지만 특별함과 디테일이 부족한 약점이 있었다. 이 약점을 알게 된 경험을 해 준 것이 바로 <노동자의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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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자본주의야!

시작과 동시에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흘러 나온다. 암스트롱의 목소리에 자본주의의 화려한 빛과 그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온갖 영상으로 편집되어 나온다. 프롤로그가 지나고 타이틀이 나오고, 이어지는 첫 단락은 노동법이 왜 만들어지게 됐는지를 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보여준다. 15분이 지나고 나면 원래 젊은 교육실장이 요구했던 근로기준법 항목을 설명하는 두 번째 단락이 나온다. 이어지는 단락은 노동법이 얼마나 자본의 입장에 휘둘리는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노동법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노동자의 입장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 설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지막 단락은 김영삼 정권의 노동정책에 맞서 왜 우리가 노동법 개정 투쟁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전체가 80분인데, 프롤로그와 자본주의 역사와 노동법을 다룬 첫 번째 단락이 작품의 1/4에 해당하는 15분이었다. 15분에 젊은 교육실장이 압도당했다. “○○조합원을 위한 근기법을 영상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부탁한 자신의 제안이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가 흐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저런 풍경이 돼서 나올 줄 몰랐고, 노동법에 빗대어 그렇게 짧게 정리된 자본주의 역사가 되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교육실장은 자본주의가 나올 줄은 몰랐다..”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확실히 이 작품에서 전반부 15분은 작품 전체의 방향과 분위기, 그리고 교육물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인식의 확장까지 모든 것을 보여줬다.

우리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근기법이라는 구체적이고 작은 소재는 근기법 조항을 하나씩 잘 설명해주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지랖이 무척이나 넓었다. 그런 영상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근기법을 둘러싼 가장 작은 이야기에서부터 가장 큰 이야기까지 모두 가야 한다’, ‘현상에서 본질까지 나아가야 한다’. 결국 종합선물세트처럼 관련 이야기들을 다 쏟아내야 작품이 끝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의 경험으로 우리는 교육물의 중요한 팁을 하나 얻었다. 노동자 교육물에서 현상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교육물을 만들려고 덤비면, 결국은 처음이고 끝이고 간에 문제는 자본주의야!’라는 것이다. 영혼이 탈탈 털리는 것처럼 힘든 작업이었지만 재미있었다.


* <노동자의 법> : 1995/80/기아자동차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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