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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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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의 햇살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길가 쪽으로 큰 창이 길게 이어져 웬만하면 햇볕이 아주 잘 들 것 같다. 그러나 창밖으로 햇살이 밝게 내리쬐고 있는데도, 아침에도 점심 무렵에도 햇볕은 들지 않는다. 햇볕이 영 들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엔 하루 중 한 차례만 볕이 아주 짧게 든다. 늦은 오후, 해가 저물기 시작할 때, 아주 강렬한 햇볕이 길게 난 창문 안으로 짧게 머문다. 제법 큰 오피스텔의 관리비 부담을 못 이겨 관리비가 아예 없는 곳으로 사무실을 옮긴 노뉴단 사무실 이야기이다. 2001년 한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나기 시작한 초가을 무렵, 우리는 봉천동의 복개천변에 북향으로 값싸게 지어진 사무실로 이사를 했다. 종일 햇볕이 없이 그늘진 건물에는 옅은 하수구 냄새가 깔려있고, 북향으로 난 긴 창문으로는 길 건너편 허름한 지붕 위에 휘날리는 새빨간 깃발이 선명했다. 빨간 깃발엔 보살이라고 하얀색으로 쓰여 있다. 을씨년스러운 사무실 풍경만큼이나 우리의 처지 역시 을씨년스러웠다. 마치 오후 늦게 짧고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처럼, 그것이 아무리 강렬해도 이내 져버릴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이제 우리의 좋은 시절은 갔고 이쯤에서 활동을 마무리해야 되는 것 아닌가하는 센티한 생각을 문득문득 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들었다.

 

구조조정 광풍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

IMF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번듯했던 회사와 그런 회사에 다니던 노동자들이 번번이 통째로 사라지곤 했다. 노동자들은 목숨 걸고 긴 투쟁을 벌이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다니던 회사와 그 자신의 존재를 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끝내는 사라지고 말았다. 삼미특수강<노동자의 사계>이 그랬고, 주택은행<파업의 노래>이 그랬고, 서울은행<희망은 따로 없다>이 그랬고, 현대중기<인간의 시간>가 그랬다. 그리고 동아엔지니어링<노동자,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랬다.

우리는 대개 구조조정 투쟁 중반쯤 결합해서 투쟁을 기록하고 그 끝을 함께 마무리하는 식으로 영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동아엔지니어링 노동조합이 우리를 찾아올 때는 이미 144일간의 치열한 구조조정 투쟁이 끝나고 청산위원회를 꾸려, 노동조합의 마지막 사업으로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조합원들에게 제대로 돌려주기 위한 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노동조합은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알 수 없는 조합원들에게 자신들의 마지막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정리해서 체불임금과 퇴직금과 함께 주고 싶어 했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 청산위원회의 활동과 1~2년 전부터 동아엔지니어링에 불어닥친 사건들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이내 사라지고 말 햇살 같은

20011127일 동아엔지니어링이 마지막 체불임금을 지급하는 장면으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1998년에 재계 10위인 동아그룹의 부도위기를 노동자들이 막아보려 고통분담에 나섰지만 회사는 끝내 부도가 난다. 젊은 신길수 노조위원장이 조합원들의 생존권 사수와 고용승계를 외치며 자결한다. 조합원들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투쟁에 돌입한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협상 끝에 노동자의 요구는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투쟁은 끝이 난다. 만족스럽지 않은 협상으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투쟁이 마무리되고 나면, 남은 일은 노동조합을 해산하는 일이다. 청산위원회의 활동을 해산하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동아엔지니어링의 회사와 노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당시 구조조정으로 사라지는 대부분의 회사와 노동자들이 이 길을 따라갔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몇 명의 노동자가 신길수 위원장의 묘지를 참배하는 모습이다. 맑고 애잔한 김민기의 목소리가 깔린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해산식을 하면서 아무리 웃고 있어도, 새로운 출발을 위해 애써 마음을 다잡아도, 원치 않았던 그 마지막은 슬펐다.

오후 늦게 내리쬐는 햇살, 짧고 강렬한 햇살,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강렬해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기에 밝은 햇살로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 <노동자, 아름다운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남았다.

 

* <노동자, 아름다운 사람들> : 200211/79/동아엔지니어링 생존권비상대책위-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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