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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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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08.16 17:41

반짝 반짝 빛나는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2003. 우리의 작업실이 봉천동의 복개천에 접해있는 곳에 있을 때, 대학 졸업반인 젊은 친구가 노뉴단에 들어오고 싶다 해서 만난 적이 있다. 잘 생긴 얼굴에 큰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는데, 그 눈만큼이나 운동(영상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에 대한 열정도 반짝거렸다. 조금 남은 학교도 갈 필요 없고 당장 노뉴단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꿈과 미래를 노뉴단에게 기꺼이 던지겠다는 그 친구에게 나는 좀 재수 없게 굴었다. 이 친구에게 나는 노뉴단은 이제 할 일을 다 끝내고 소멸해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일단 학교를 졸업하고 보자고 했다. 이 반짝거리는 친구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실은 그때, 정확히 말하면, 부담스러웠던 것은 반짝반짝 그 친구가 아니라 노뉴단이었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설립부터 해산까지

이즈음 노뉴단은 한 달 한 달 작업실을 운영하는 일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를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다. 우리 활동의 주요 무기였던 뉴스 작업은 이미 <참세상>이 더 잘 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뉴스 대신에 교육물을 잘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교육물 제작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재정적으로 어렵고, 뭘 향해 달려가야 할지 잘 모르겠고, 노뉴단이라는 자존감은 이미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작업실에는 화장실 냄새가 옅게 깔려있고, 복개천을 달리는 차 소리가 하루 종일 웅웅거렸다. 모든 것에서 탈출하고 싶은 시간들이었다. 찌질하고 무기력한 시간들이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이중의 적>을 만들었고, 이 작업으로 우리는 많은 것들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중의 적>20001014일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설립부터 20025월 노조 해산 총회까지,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의 아픈 투쟁이야기를 다룬 제법 긴 장편이다.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계약직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규직노조에 가입하려고 했으나 정규직노조의 거부로 안 됐고, 복수노조 금지조항 때문에 독자적인 노동조합도 건설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정규직노동조합의 규약 개정을 통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하고 출범했다. 그러나 이후 정규직의 이런저런 핑계로 진정성 있는 연대를 단 한 차례도 경험하지 못하고, 배신감과 절망만 깊어지다가 끝내 계약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건설한 노동조합을 자신의 손으로 해산하고 만다. 이 일 년간의 이야기를 <이중의 적>13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상당히 촘촘하게 엮어냈다.

 

존재의 다름을 확인하는 슬픈 이야기

투쟁의 전선戰線은 끝가지 두 개였다. 사용주인 정부와 함께 하기로 한 정규직 노동자. 둘은 다르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겹쳐서 존재했다. <이중의 적>은 바로 이 겹쳐져 있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 이야기는 투쟁하는 조직이 해산을 향해 가는 슬픈 이야기였고,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같은 편이 아니고 일 수도 있겠다는 존재의 다름을 확인하는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가치는 바로 이 다름에서 나왔다. 다름을 들여다 본 것이, 단지 이 작품을 투쟁보고서로 치부할 수 없게 했다. 애초부터 이 작품은 좀 더 예민하게 이 다름을 들여다볼수록 작품은 더 깊고 더 많은 가치를 담아낼 수밖에 없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투쟁과정을 밀착해서 촘촘하게 촬영한 탓이 컸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같은 노동자이니까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탓이었다. 적어도 한 번 쯤은 둘 사이에 다름을 이야기 할 때가 된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작업에, 그리고 단체를 운영하는 일에 이런저런 존재이유들을 찾았다. “누가 이런 일을 하냐?”, “그래도 노뉴단 아닐까?” 당시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노뉴단의 2백여 편이 넘는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을 작업하면서 당시 겪고 있던 무기력증에서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주 조금. 그러나 작품으로 남은 <이중의 적>은 노뉴단에서 일하고 싶다는 젊은 친구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반짝반짝 빛나는 눈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 이유를 일깨우는, 위로와 같은 작품이 됐다.

 

* <이중의 적> : 20037/129/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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