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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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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월 

노동자 민중의 분노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전노협백서> 제목은 전노협 진군가가사에서 따왔다. 가사 흐름이 전노협 건설과 사수투쟁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전노협의 활동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다. 1991년 전노협 활동을 다루는 백서 4권의 제목은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이다. 915, 목숨 걸고 투쟁한 이들이 있었다. 그 투쟁은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을까.

 

150억 뇌물이 오간 대통령과 한보그룹의 정경유착, 수서비리 사건

한국 사회 1991년을 연 사건은 수서비리였다. 한보그룹은 1987년 기업정상화 자금을 지원받았다. 보유 부동산을 처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구제금융이었다. 그런데 한보그룹은 자그마치 418억을 부동산 매입과 로비자금으로 썼다. 당시 세계일보가 특종 보도한 바에 따르면 1991121일 서울시는 수서 택지개발지구 토지 35천여 평을 주택조합에 특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땅은 서울시가 무주택 서민들에게 분양해야 할 땅이었다는 것이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택지조합 임원과 공모하여 일을 꾸몄는데 여기에 국회, 정부 관계자, 청와대가 연루되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뇌물, 압력 등 전형적인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이때는 노태우 정권이 경기침체와 물가 폭등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과격한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몰아세우고 있었는데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분노가 일 수밖에 없었다. 민중당 주도 집회가 열렸고 재야인사들은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철야 농성을 하며 특별검사제 도입을 요구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316일에는 국민대회가 열렸다. 전국 18개 도시에서 열린 집회에 24천여 명이 참가했다. 경찰은 원천봉쇄와 최루탄으로 맞섰다. 시내 곳곳에서 가두 투쟁이 벌어졌다. “검찰수사 못 믿겠다 특검제를 실시하라! 정경유착 부정부패 민자당을 해체하라! 노동탄압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하라! 수서비리 진짜주범 노태우를 구속하라!” 이 날 4천여 명이 연행되었다. 419일에도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가두투쟁에서 민중들은 낙동강 페놀방류 사건도 규탄했다. (노태우가 한보그룹으로부터 150억 원 뇌물을 받았음이 4년이 지나 밝혀졌다.)

 

이윤만 추구하는 자본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 낙동강 페놀오염 사건

19913월 영남지역 임산부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집단 시위 및 보상투쟁으로까지 끌고 간 사건이 발생했다.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

밀양 수질 기준 37배 충격, 부산 일부 취수장 취수 중단등 신문들은 낙동강 오염을 집중 보도했고 동아일보도 기업 비도덕 드러낸 페놀 충격이라 보도했다.

314~15일 사이 8시간 동안 구미공단 두산전자에서 페놀 원액 30t이 낙동강 수원지로 유입되었다. 페놀은 가전제품용 회로기판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산전자는 누출 사실을 감췄고 원수 검사 과정에서는 페놀이 검사항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문제를 악화시켰다. 수원지에서는 원수에 페놀이 함유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악취를 없애겠다고 염소를 투입해 화학반응을 일으켜 클로로페놀로 변한 것이다. 그러자 악취가 500배 이상 강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악취가 아니라 페놀 성분의 독성이었다. 클로로페놀은 방부제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직접 피해자인 대구 시민들은 집단 항의에 나섰다. 두산제품 불매운동에 전 국민이 호응했다. 이 사건으로 대구 환경처 직원 7명과 두산전자 관계자 6명 등 13명이 구속되고 공무원 11명이 징계 되었다. 두산전자에 대해서는 30일 영업정지 처분을 하였으나 고의성이 없었다는 이유로(페놀 유출이 배관손상 때문이라는 것) 20일 만에 조업 재개가 허용되었다. 그런데 4월에 다시 2차 유출 사건이 발생한다.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이 물러나고 두산전자에는 64일의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하지만 대구시민들은 엄청난 악취와 환경오염 공포에 시달리는 피해를 입은 뒤였다. 게다가 조사 결과 두산전자는 이전에도 정화비용 500여만 원을 아끼기 위해 페놀을 정화하지 않고 버린 일이 여러 번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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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비리 규탄 국민대회를 보도한 <한겨레신문> 1991.3.17.


1987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다. 뜨거운 여름, 전국을 달군 투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였으나 정권의 행보는 기대에 어긋났다. 물가는 폭등하고 무주택 서민들의 설움이 폭발하는데, 택지를 둘러싼 비리가 폭로되었으니 민중의 분노는 치솟았다. 여기에 경영악화라고 우는 소리를 하면서 기술개발, 시설투자로 경쟁력을 키울 생각은 않고 부동산 투기에 몰두하고, 500만 원을 아끼려고 페놀을 방류하는 자본을 보며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윤 추구를 최고로 하는 자본과 이와 한통속인 노태우 정권은 의혹과 불신의 대상이었다. 1991년 노동자 민중의 분노와 저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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