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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5.01 20:59

유럽연합의 실체

: 누구의, 무엇을 위한 국제주의인가


조영태┃영국 런던대 SOAS, 정치경제학 연구자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둘러싼 영국의 정세가 혼란스럽다. 영국 의회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의 관계를 규정할 보수당 메이 총리의 안을 수차례 거부했고, 좌‧우 정치세력이 제출한 각종 안도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애초의 브렉시트 기한인 2019년 3월 29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EU가 계속 기한을 연장해주고 있지만, 브렉시트를 둘러싼 정세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예측 불가다. 과반의 지지를 받는 안이 없고, 여야 간 합의도 원활하지 않다. 국민투표 재실시와 조기 총선도 선택지로 거론되지만, 이 역시 결과를 장담할 수 없기에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좌파적 브렉시트’ vs ‘다른 유럽은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어떤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EU는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기구이고, 이를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한 기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브렉시트는 신자유주의와 단절하고 노동의 반격을 시작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향후 노동당 코빈 대표가 집권한다면, △철도 등의 재국유화 △일자리와 사회복지를 위한 재정지출 확대 △산업 육성을 위한 보호관세와 지원금 등의 정책을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이에 걸림돌이 될 EU를 반드시 탈퇴해야 한다며, ‘좌파적 브렉시트Lexit’ 혹은 ‘민중의 브렉시트People's Brexit’를 주장한다.


둘째, EU가 신자유주의 기구인 것은 맞지만, 이민자 혐오와 국수주의에서 시작한 브렉시트는 신자유주의와의 단절은커녕 극우세력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므로, EU에 남아서 노동자민중의 권리 증진을 쟁취하기 위한 국제연대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EU보다 느슨한 WTO 체제 하에서 급진 정책을 펼치자는 ‘좌파적 브렉시트’ 입장은 EU가 보장하는 노동권‧사회권마저 버리고 WTO 체제 하에서 더 강경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려는 극우적인 브렉시트 계획과 논리적으로 다를 바 없다며, ‘다른 유럽Another Europe is Possible’, ‘유럽의 사회주의화Labour for a Socialist Europe’를 주장한다. 그러나 ‘좌파적 브렉시트’ 논자들은 이들의 주장이 EU에 대한 이해 부족 또는 환상에 기초한 자유주의 좌파의 입장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EU의 본질과 변화 가능성’에 대한 입장 차이, ‘브렉시트를 가결한 정서적 배경이 EU와 영국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인지 아니면 이주민 혐오와 국수주의인지’에 대한 입장 차이, 브렉시트가 가져올 결과 가운데 ‘무역 감소‧경제 위기‧이주의 자유 축소 등 부정적 영향이 클지 아니면 급진적 정책을 펼 자유의 증가 등 긍정적 영향이 클지’에 대한 입장 차이 등이 뒤섞여, 브렉시트에 대한 좌파‧사회주의자들 간의 입장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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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 쪽은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 기구인 EU를 떠나서 민중의 주권과 권력을 쟁취하자는 것이다(위 사진). 다른 한 쪽은 브렉시트 자체가 극우세력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므로, EU에 남아 '다른 유럽'을 만들자는 것이다(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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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와 신자유주의


브렉시트에 대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전제가 있다면, EU가 기본적으로 ‘친자본 반노동’의 신자유주의 기구라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무엇보다 EU는 탄생 자체가 유럽 자본의 이익을 위한 시장통합의 결과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작된 유럽 시장통합의 역사는 1957년 로마조약 체결로 빛을 보았는데, 그 결과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EEC”는 기본적으로 회원국 간의 관세철폐를 추구하는 관세동맹이었다. 유럽의 시장통합은 복잡한 국가 간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냉전 시기 유럽 경제의 재건을 통해 노동자 투쟁의 격화와 소련 등 사회주의권의 성장을 막아 유럽 자본주의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유럽의 시장통합 수준은 낮았고, 전후 장기호황의 영향 아래 유럽은 경제 성장‧소득 증대‧불평등 완화의 성과를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유례없던 장기호황이 끝나면서 상황은 변했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노동계급이 정치적‧사회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8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며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승리’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현재의 EU가 탄생했다.


EU는 그동안의 유럽 시장통합 역사의 일단락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조약 때부터 추구했던 ‘재화‧서비스‧자본‧인간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단일시장 원칙을 재천명했고, 단일화폐인 유로화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제 유럽 자본은 더 싼 인건비, 더 적은 납세 의무를 찾아 EU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EU 내 변방국에서 밀려오는 이주노동자들을 싼 값에 부릴 수 있게 됐다. 한편, 유로존에 포함된 유럽 각국은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운용할 수 없고, 포함되지 않은 나라들도 산업‧무역‧재정 정책 등 사회경제정책을 폭넓게 시행하기 어렵게 됐다. 자본이 더 싼 인건비와 더 적은 납세 의무를 찾아 EU 내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상황에서, 각국 정부가 자본 유치를 위해 세금은 적게 걷고 노동은 억압하는 친자본 반노동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정과 성장” 조약이 (잘 지키지는 않지만) 정부 예산적자와 부채를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3%와 60%로 제한하면서 각국은 재정긴축에 돌입했고, 그 결과 유럽 노동자민중의 복지 수준은 상당히 후퇴했다.



고통전가 기구, EU


둘째, 2010년 이후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EU의 대응은 신자유주의 그 자체였다.


EU는 위기의 원인이 해당국가의 제도적 문제에 의한 경쟁력 약화라고 파악했는데, 이 ‘제도적 문제’에는 노동자의 고용과 권리 보호, 넉넉한 연금제도, 산업‧자원에 대한 국가 소유 등이 포함됐다. EU가 내놓은 해결책은 재정 긴축‧임금 삭감‧규제 완화‧사유화였다. 한국이 1997년 IMF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유로화 체제에 묶여 있어 ‘환율 조정을 통한 수출 경쟁력 회복’을 도모할 수 없었던 그리스 등은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유럽 재정위기가 2007년 이후 위기에 처한 은행과 기업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긴 것이다.


또한 EU는 위기국가의 은행과 기업에 돈을 빌려준 독일‧프랑스 등 중심 국가 금융자본이 손해를 보지 않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 ‘단일화폐를 사용하는 단일시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국가 간 채무의 완화나 공동부담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위기의 극복과정에서 유로화 체제의 모순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독일의 수출산업 자본이었다. 즉, 위기의 일부를 EU 중심 국가에서 변두리 국가로 떠넘긴 측면도 있다.



누가 상황을 이끌 것인가


이렇듯 역사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기구로서 기능한 EU를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한 기구’로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EU는 단순히 신자유주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를 각국에 전파하고 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EU 내의 개혁이 더욱 어려운 것은, EU의 권력을 유럽중앙은행ECB 등 선출되지 않은 엘리트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이 신자유주의에 찌들어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하나의 권력인 “유럽이사회”는 각국 대통령과 총리가 모이는 회의로 나름의 ‘선출 권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만장일치 제도인 유럽이사회에서 급진적 정책을 추진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EU 잔류와 내부 개혁’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브렉시트 하의 정세를 어떻게 노동자민중 주도로 이끌 것인지 고민하고 조직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미 브렉시트를 결정한 상황에서 잔류로 되돌리는 과정 자체가 만만치 않고, 이 과정에서 반이민‧국수주의 정서가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또, ‘EU 잔류’만이 국제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EU 하에서 수많은 난민‧이주민이 입국 거부와 단속으로 죽어 나간다. 게다가 영국 이주민의 2/3 정도는 EU 출신이 아니고, 이들은 EU 출신 이주민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에 있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EU 출신 이주민의 권리를 지키고 지속적인 이동의 자유를 유지하도록 투쟁해야 하지만, 이는 이후 EU와의 관계 재설정 과정에서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EU와의 관계 재설정을 보수당 정부의 손에서 사회주의 좌파의 손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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