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112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9.01 17:22

연재를 시작하며:

맑스주의, 실천적 철학을 향해


이재유┃서울



‘철학’은 두꺼운 책을 끼고 연구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각자의 철학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특히나 이 자본주의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선 맑스주의자들은 지난 150년 가까이 자신들의 실천과 철학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번 호를 시작으로 월 1회 연재하는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 코너에서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새로운 대안’과 ‘불안한 유령’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자본주의 위기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 위기, 기후 위기, 코로나19 사태, 그리고 이에 따른 전체주의 등장의 조짐 등등. 이런 복합적 위기에서 많은 사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며,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길 열망하고 있다. 새로운 대안으로서 맑스주의(또는 맑스주의의 대명사로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바로 지금 여기에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새로운 대안을 열망하는 대중은, 아직 오직 않은 이 새로운 대안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서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너머에 있는 것으로서, 대중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리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유령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대중과 ‘불안한 유령으로서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대중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이는 변혁당의 “사회주의 대중화”라는 목표와도 직결된다. 그런데 ‘사회주의’와 ‘대중’을 이원화시키는 관점에서는 ‘이 둘의 결합이 가능하긴 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거꾸로 ‘이러한 이분화의 관점이 온당한가’, 즉 ‘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관인가’하는 비판적 물음을 제기할 수 있고, 또 제기해야만 한다. 이런 비판적 물음이 없었다면, 서양 철학의 역사나 맑스주의 논쟁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주의-대중’이라는 이원화의 관점을 비판적(근원적, 철학적)으로 밀고 나가면, 우리가 익히 들었던 ‘정신-물질’이라는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대개 우리는 이 둘의 관계에서 ‘정신’을 우선적이라고 보는 세계관을 ‘관념론’이라고, ‘물질’을 우선적이라고 보는 세계관을 ‘유물론’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맑스주의 또는 맑스주의 철학은 철저하게 유물론의 세계관을 갖고 있고, (대체로 데카르트-칸트-헤겔의 계보로 이어지는) 독일 철학은 관념론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다.


112_41.jpg

[사진: Marxists Internet Archive]



유물론? 관념론?


그런데 맑스주의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을 ‘물질이 정신보다 우선적’이라는 빈약한 유물론으로, 그리고 단순히 ‘관념론의 반대’로서의 유물론으로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물질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신의 ‘추상작용’의 결과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설명한 “가치” 개념에서 잘 나타난다. 맑스주의 내의 가치론 논쟁에서 가치를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학파도 생겨났다).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두 세계관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호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분리할 수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제가 될 수밖에 없는 동일성의 세계관이다. 즉, 이 두 세계관은 동전의 양면이며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다.


가령, 자본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노동생산물로서의 사용가치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것이 단 한 알갱이도 들어가 있지 않은’ 비물질적인 노동, 즉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서의 가치’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을 단지 ‘관념론의 대척점’으로서 파악한다면, 맑스주의 유물론은 오히려 관념론으로 전락하며 자본주의 세계관을 넘어설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앞으로 이 코너에서 다루게 될)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에서 대표적으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나 스탈린의 일당 독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맑스주의 유물론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맑스주의 유물론의 성격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논쟁점이 형성된다. 그 논쟁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 사적 유물론 or 변증법적 유물론인가? - 실천적 유물론

2. 사회주의 or 공산주의는 무엇인가?

- 과학적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3. 역사 발전의 문제

- 역사는 필연적인가 or 아닌가?

4. 생산력-생산관계 or 토대-상부구조의 관계

- 생산력 or 토대가 우선적인가?

5. 혁명 주체의 문제

- 혁명이란 무엇인가? - 노동자 대중 or 당이 주체인가? - 계급과 계급의식의 관계


112_42.jpg

△ 맑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마지막 11번째 테제로 적어놓은 문장.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역사적? 변증법적? 실천적!


맑스주의 유물론은 대개 ‘()사적 유물론’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표현된다. 그런데 맑스는 자신의 유물론을 ‘()사적’이니 혹은 ‘변증법적’이니 하는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이런 규정은 맑스 사후 엥겔스에 의해 이뤄졌다. 맑스는 자신의 유물론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고, 다만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실천()”이라는 개념으로 암시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헤겔은 서양 철학사에서 역사와 변증법의 개념 규정을 정점에 올려놓은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런데 ‘관념적인 것’으로서의 역사와 변증법, ‘물질적인 것’으로서 유물론이 서로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심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물질적인 것이 관념적인 것으로 동화되어 맑스주의 유물론이 헤겔 관념론의 아류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맑스 또는 맑스주의 유물론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이다. 맑스 유물론의 특성이 ‘실천’에 있다면, 이 ‘실천’이 정신-물질이라는 대립 구조를 어떻게 뛰어넘으면서 이 둘을 통일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규명이 필요한 것이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관념론(헤겔)과 (포이어바흐를 포함한) 기존의 유물론 모두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유물론이 ‘실천적’이고 ‘혁명적’이라고 규정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민해야 할 점은 정신-물질의 대립 구조를 뛰어넘는 인간의 실천()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를 공부하면서 고민하고 규정해야 하는 것이며, 맑스주의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맑스주의 철학은 골방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 유물론을 이렇게 규정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를 넘어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주의가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명확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 유물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과학적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적 현실을 중시하는 ‘과학’의 모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경험적 현상들을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법칙이나 원리 속에서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통일시키는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는 ‘과학’의 모습으로 이원화될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이원화는 맑스주의 철학 내 논쟁들로도 이어진다. ‘역사 발전은 필연적인가, 아니면 역사에는 발전이라는 것이 없는가?’ ‘생산력 또는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우선하는가, 아니면 상부구조가 토대로부터 독립적인가?’ ‘혁명의 주체는 당인가, 노동자 대중인가?’ 앞서 말했듯, 맑스주의 유물론이 ‘물질의 우선성’이라는 테제에 머무르면 유물론은 관념론과 동일해진다. 이는 이후 살펴보게 될 로자 룩셈부르크와 수정주의 논쟁에서, 수정주의자들(개량주의자, 의회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노조 지도자들이 계획되지 않은 자발적인 노동자 대중의 파업을 싫어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는 세계관으로서의 맑스주의 유물론을 정립하려고 했던 의지와 열정과 실천의 결과물이다.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는 몇몇 유물을 전시해 놓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 박물관의 역사가 아니다.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현대 인류에게 이 논쟁사는 과거,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펄펄 살아 있는 인간의 실천 활동 그 자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실천 활동은 맑스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본성이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앞으로 이 지면에서는 본격적으로 맑스주의 철학 논쟁사를 다룰 예정이다. 이 논쟁사는 엥겔스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엥겔스는 맑스 생전에 맑스와 같이 활동했던 엥겔스가 아니라, 맑스 사후의 엥겔스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맑스 사후의 엥겔스로부터 이 논쟁사를 시작하는 것일까? (다음 회에 계속)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