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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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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9.01 11:17

원산 전 노동자 2천여명의 총파업

산업도시로서의 모든 기능 마비


201┃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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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18일 당시의 거대기업 문평제유회사의 일본인 십장 고다마의 조선인 유조공 박준업 구타사건에서 비롯했다. 제유노동자들은 이에 노조를 만들고 원산노련에 가입했다. 사측은 사태 초기에 십장의 해고와 단체협약 등을 논의하고 1929년 1월1일까지 해결하기로 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 약속을 미루기만 했다. 1929년 1월3일 “문평 라이징선 석유회사 직공 160명이 8시간노동제, 취업규정 개정, 무료목욕탕 건립, 파업중 일급 지불, 지배인 사직 등을 요구”했다. 또한 원산 부두노동자들도 “대성상회 등 9개 운수회사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문평제유회사는 협약안과 교섭상위단체인 원산노련의 존재를 아예 부인한다. 원산노련은 부두의 하역작업을 전면 거부하지만 원산상업회의소와 기업들은 되레 파업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고,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들도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1929년 1월14일 원산노련은 이미 10일간 무르익은 총파업을 공식선언한다.

상의의 책임회피와 기만, 도발적인 태도는 오히려 총파업으로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1월19일 함남도지사와 함남경찰부장 발령, 원산부윤과 원산경찰서장을 경질하는 등 지난 1927년 6월 파업 패배의 교훈(조선인 출신 중소상업인을 배제하거나 원산지역 경찰행정계통 조선인의 노조에 대한 협력을 사전에 끊는 것이 우선임)을 잊지 않고 일제에 협력할 지역인물을 배치하며 치밀하게 대응한다. 합법적 쟁의임에도 불구하고 24일부터는 헌병대 등 군대까지 동원, 원산노련 간부를 납치 구금하며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본 십장의 조선노동자 구타사건에서 비롯

세계 경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생산 과잉과 구매력 감소 등으로 1926년부터 공황의 기운이 완연해졌다. 유럽과 미국의 노동력 중 1/4이 실업 상태였다. 가격과 임금이 폭락하고 경제공황은 1929년 10월24일,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의 결정타만 남겨둔 시점이었다. 일본의 경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제불황과 사회불안은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과 관련한 다양한 사상과 유행을 가져왔고, 반제국주의의 물결이 일었다.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검거했다. 연이어 천황교체기의 불안과 군부 내 육군과 해군의 갈등이 맞물려 정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군벌의 난립과 북벌을 위한 1차 국공합작, 국공합작 종료 후 국민당과 중국공산당간 투쟁으로 대륙이 혼란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일제는 만주와 동남아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전쟁수행엔 석유의 공급과 관리가 필수다. 공업지대 원산의 다국적 제유회사노조의 파업도, 이에 연대한 원산노련의 총파업도, 자본의 노동에 대한 견제와 일제의 전략적 필요라는 측면에서 일제의 군대와 상의 모두에게 일대결전할 필요가 충분했다. 원산총파업은 시기적으로 코민테른과 연계한 국내 사회주의자, 조선공산당원들에게 매우 큰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조선공산당계 간부들은 일제에게 검거 당했고, 원산노련에는 경제투쟁에 한정하는 노조활동을 긍정하는 지도부가 남았다. 그런 원산노련이 이런 정세 속에서 어떻게 총파업을 이끌었으며, 과연 당시 원산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은 무엇이었을까.


총파업의 절정 1929년 1~2월, 전국 각지에서 연대 쇄도

초기 상황은 원산노련에 유리했다. 일제와 상의는 관제신문인 원산매일, 함남시사신보 등을 통해 파업의 부당성을 알리는 선전공세를 퍼부었다. 그들은 파업 결원을 메우기 위한 원산 인근의 대체노동력을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경찰과 소방대, 일본인 민간단체 국수회 등까지도 총동원하여 인천항을 통해서 농민과 한산노동자 200여 명을 간신히 구했다. 인천노련의 연대가 성공한 것이다. 중국인 노동자를 모집하려고 했으나 중국영사가 원산부윤을 통해 대체노동을 제공하지 말 것을 요청했기에 그것도 실패했다. 그나마 대체노동도 파업단의 규찰대가 저지했다. 원산노련 측은 식량과 자금 모두에서 충분히 대비한 상태였다. 지도부 아닌 세포단체(도중) 중심으로 온건하고 합법적인 파업을 지속하면서 폭동을 자제하고 규율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인 여론은 원산노련에 유리했다.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연맹에서 위문원과 조사원이 속속 원산에 도착했다. 총독부 식산국조차 ‘질서정연한 행동’으로 일관한 총파업이라 평가하며 상의의 ‘본분이상의 무모한 행동’을 비난할 지경이었다. 이 시기 인천, 목포, 평양 등 전국 각지 노동자들의 지원기금과 격려전보가 쇄도하고, 원산 내 운송부 뿐 아니라 직공부, 인쇄노동자와 짐수레 노동자도 동맹파업에 들어간다. 2월1일 원산 내 일본인 정미공, 양화공들이 원산노련에 동조파업을 전개했고, 아직 원산노련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던 노동자(한산노동자)들도 파업 기간 중 자유노조를 결성해 파업에 참여했다.

이 시기 “元山 商界가 대타격을 받아 파산자 속출 및 각 은행 비상경계에 돌입, 증권·어음 교환이 전무”했다.(동아일보 1929,1,27) 원산의 전 노동자 2,000여 명의 총파업은 운수산업을 비롯, 모든 산업도시로서의 기능을 마비시킨 것이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사 연표

김경일, <한국근대노동사와 노동운동>, 문학과 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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