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8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9.01 11:44

어떤 계절


누군가는 그저 멍하니 지나가고, 누군가는 헛웃음을 웃었다. 넋이 나간 얼굴 몇은 아주 잠깐 창에 대고 열기를 식혔다. 손가락 하나가 희부연 유리창을 죽 긋고 지나간다. 어려 있던 물기가 흘러내리고 사무실과 측정실, 실험실이 차례로 드러났다. 몇 대의 측정 장비들과 회전의자가 무심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멍한 허공을, 그저 무심한 것들을 식히기 위해서 에어컨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현장의 공기는 뜨겁고 답답하다. 그 앞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사출라인이나, 130도 열탕수조에 코를 박고 일하는 고열장비나 모두 작업복 조끼를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자칫 노동자들이 소속감을 잃을까 두려운 관리자새끼들은 순찰을 돌며 조끼를 입으라고 짖어댄다. 우리는 저마다 잇새에 쌍욕을 물고 있다.

사실, 쉬러 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20도의 텅 빈 사무실과 측정실도 이제는 별스럽지가 않다. 밸이 뒤틀리는 것도 그때뿐이고, 미깔맞은 현장관리자들을 매일같이 대하듯이, 그저 매일같이 지나칠 뿐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이 여름을 견뎌낸다. 비라도 푸짐하게 내리면 창문을 열어서 바람을 끌어들인다. 지친 동료를 옆에 감춰두고 두 몫을 하다가 낌새가 있을 때마다 발로 벽을 콩콩 찍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무거운 제품을 나르는 동료를 몰래 데려가 불 꺼진 휴게실 컴컴한 의자 위에 박카스와 쌀과자, 이름 모를 열매를 늘어놓는 동료도 있다. 200도에서 300도를 오가는 노즐 앞의 사출 동료들에게는 가능한 모든 걸 양보한다. 째깍째깍 순식간에 지나가는 짧은 휴게시간임에도 잠깐 멈춰서, 기진맥진해 내려오는 사출 동료들을 지켜보거나, 더러는 손을 내밀어 잡아주기도 한다. 옥외 흡연실에서는 서로의 등짝에 내려앉은 모기를 잡아주는 소리가 찰싹찰싹한다. 누군가 쑥불을 피워야한다는 실없는 소리를 해대고, 어린 시절 섬진강 철로 변에서 위험한 장난을 하던 얘기가 튀어나온다.

차라리 여름은 견딜 만하다. 아니, 어쩌면 여름은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부러진 날개의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더운 바람을 불어주기는 해도, 뭔가 서로를 더 챙겨주고 배려하는 계절이다. 정작 견디기 힘든 계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휴가가 끝나고 돌아온 현장은 낯설게 변해있었다. 통로만 대충 바르던 바닥 에폭시 작업을 설비를 다 들어내고 했는지, 현장은 빈틈없이 반짝거렸다. 설비 배치도, 작업장 구조도 달라졌다. 공정별로 흩어져 있던 설비가 아이템에 따라 원스톱으로 배치됐다. 이틀 뒤에 람다에서 두 명을 뺀다는 소리가 나왔다. 어떤 건 없어지고, 무언가 새로 생긴다는 얘기부터, 돈 안 되는 건 다 버리고, 알맹이만 모아 공장을 합치라는 그룹회장의 지시까지, 출처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람다에서 불려나간 동료는 엉뚱한 데서 일을 시작했고, 빈자리는 그 옆의 동료가 맡았다. 엉뚱한 일을 맡고 쫓겨 간 동료나, 갑자기 세 대의 설비를 맡은 동료나 뭐라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저쪽에서는 사람이 늘었으니 우리 중 누군가 빠져야 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쪽에서는 바빠진 동료가 좁은 통로를 정신없이 지나가다가 옆 설비의 제품 12개를 모두 리셋해버렸다. 언성이 높아졌다. 말다툼하는 둘을 떼어놓는데, 사각거울 밑에서 생산관리 한 놈이 뭔가를 끼적거리고 있다. 이층에 올라가는 척 들고 있는 보드를 넘겨다보니, 타이머를 켜놓고 계산을 하는가 하면, 작대기를 그어가며 뭔가 헤아리고 있었다.

휴게시간, 아무개가 벌써 위에 얘기를 해서 어떤 설비만 맡기로 했다고, 혼자서 저 살 궁리라면서 낮은 목소리로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A공장처럼 파견직 동료들을 다 내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못들은 척 지나쳐 람다에서 옮긴 동료에게 갔다.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더니 먼저, 걱정을 말란다. "또 때가 됐어. 이게 다 철이 있어. 한 몇 년 잠잠하더니 또 시작인거야. 나는 벌써 이게 4번째야. 밑에 있다가 경기도로 올라왔지. A공장에서 B공장으로 그러다 여기서 권고사직 한 번, 야단났었지. 이번에도 그 짝인 모양이다." 권고사직이라는 말보다 더 듣기 괴로운 말은 “철이 있어, 때가 되면 그렇게 지나간다”는 말이다. 중소사업장은 힘들어서 어쩔 수 없고, 누군가는 나가야 하며, 앞서 그렇게 나갔듯이 나도 때가 되면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 불량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고, 누군가에게 동료를 헐뜯어서라도 제 입지를 굳히려고 애썼던 경험은, 그렇게 제 자리를 지켰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내 자존감마저 지켜주지는 못한다. 무너진 자존감 그 빈자리에 체념이, 무장해제의 패배가 들어섰을 것이다. 언젠가 공장장은 이를 두고 '경험을 통한 단련'이라고 말했다. 놈은 다시 또 그런 일이 있어도 잘 지나갈 수 있을 거라며 보이지 않게 웃었다.

벌써 여러 번 살풍경의 계절에 휩쓸린 우리가 이 계절을 지울 수 있을까. 기진맥진해 내려오던 동료를 잡아주듯이 아무도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을까. 콩콩 벽을 두드리듯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서 함께 싸울 수 있을까. 저만치서 “나는 그럼 뭘 하느냐” “누구 하나가 빠져야지”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여름에도 함함했던 동료들이 어느새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