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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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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현대자동차에서 (2)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는 항상 성장하고 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리고 어떤 특정한 시기에 누군가는 성장하고, 누군가는 그 성장을 지켜보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성장을 지켜보는 일, 그것은 기다리는 일이기에, 누군가를 믿는 일이기에 생각보다 어렵다.

 

기다림을 버리고 서두름을 쫓다

1998년 무더위 속에서 현대차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노뉴단은 세대교체 중이었다. 노뉴단의 핵심적인 부분인 연출에서 창단 멤버가 사라진 지 이미 몇 년 됐다. 새롭게 완성된 연출 역량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열심히 성장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사실 두 역량 사이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작은 차이를 좁히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노뉴단에는 그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기다려 주는 역할이 필요했다. 그러나 막상 그 역할이 절실할 때에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기다림을 이내 포기하고 말았고, 기존의 완성된 역량에 번번이 의지하곤 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우리는 또 그랬다.

<일터에서> 상영 후, 우리는 모두 찝찝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찝찝함을 빨리 털어내고 싶었다. 기회가 왔다. 당시 인권영화제에서 현대차의 정리해고 투쟁을 다룬 작품을 상영하고 싶어 했는데, 완성된 작품이 없으니 제작을 해서라도 상영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노뉴단이 그 작업을 해줬으면 했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 작업을 맡을 친구가 노뉴단에 있었다. 키가 큰 친구가 울산의 현대자동차 안에서 계속 촬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몇 사람 더 울산을 오가며 촬영하긴 했지만, 가장 먼저, 가장 오랫동안 투쟁 현장에 있으면서 촬영한 키 큰 친구가 있었기에, 현대차의 정리해고 투쟁 작업은 그 친구가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이 작업은 서울에서 다른 작업 때문에 울산 현장에 거의 내려가지 못했던 다른 친구가 하게 됐다. 이유는, 영화제 상영작이라는 것과, 당시 노동운동계의 이목이 집중된 현대차 정리해고 투쟁이라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는 점,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손이 빠른 친구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 작업은 키 큰 친구에게 부담이고 완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였다. 이 작업에 대한 키 큰 친구의 진정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저런 현실성을 핑계로 그렇게 결정했다. 기실 현실성이라는 것은 동료의 성장을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일을 포기한다는 무책임하고 치졸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인권영화제 상영

여하간 현대차 정리해고 투쟁은 노뉴단의 가장 핵심적인 연출자가 작업을 했다. 급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 이 작품을 상영하지 않았다. 이 작업을 상영할 때는 이제 막 현대차의 정리해고 투쟁이 끝날 즈음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투쟁의 끝 무렵엔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기 보다는 새로운 절망부터 시작된다. 당시 현대차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노조의 합의로 큰 논란을 남겼는데, 영상은 어느 한 부분에서 이 문제를 맥락 없이 드러냈고, 이것이 빌미가 돼 노조에서는 노뉴단의 결과물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게 됐다. 결국 노조는 이런 상태의 영상이라면 상영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상황에서 우리 내부의 상반된 의견에 대해 어느 한쪽을 강하게 제기하고 싶다면 반드시 다른 한쪽도 언급해야 했다. 그리고 결기 있게 깊이 파헤치는 만큼 책임감 있게 봉합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제작시간은 너무 부족했다. 양쪽의 의견을 드러내거나 감싸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우리는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했으며 감싸지도 못했다. 영상은 우리의 생각이 모호한 상태로 드러났고, 결국 완성도가 많이 아쉬운 작업이 되고 말았다. 영상의 완성도가 아쉽다는 것은 무슨 말을 할까?’에 대한 작업자의 고민이 아쉽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결국 그것이 빌미가 돼 우리는 노조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말 한마디 못 꺼낸 채 상영을 접고 말았다. 이후 작업을 더 보강해서 내놓자고 했으나 보강은 되지 않았고 작품은 단 한 번의 상영으로 끝났다.

누군가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재미도 있고 감동적이다. 노뉴단에서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지켜보지 못했고 기다리지 못했고 신뢰하지 못했다. 얼마 후, 키 큰 친구는 노뉴단을 떠났다. 물론 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떠났지만, 두고두고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 그 친구가 삶의 길목에서 어려움에 부딪혀 힘들 때, 알 수 없는 더 깊은 슬픔을 느낀다. 그때 현대차의 정리해고 투쟁이 아무리 중요한들, 영화제가 아무리 중요한들, 함께 일하는 동료의 마음을 보듬는 것보다 중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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