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81호 사회변혁노동자 2019.03.01 14:54

“김용균이라는 빛”

그 투쟁의 빛과, 빚


이승철┃집행위원장



81_김용균이 남긴 것.jpg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노동자의 장례가 2월 9일 노동자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지난해 12월 11일 사고 발생 이후 62일, 고인의 시신이 서울로 올라온 후 19일 만이다. 고인의 죽음 뒤 숨 가빴던 62일은 “위험의 외주화 중단”이라는 구호로 노동안전과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 전체에 알렸고, 한편으로 우리 운동의 많은 한계와 과제를 보여줬다.


그가 남긴 빛, 수면 위로 끌어올린 “위험의 외주화”

물론 이 싸움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사고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등 아직 다 풀리지 못한 채 진행 중인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싸움의 결과 국무총리가 임명하는 진상조사위원회 설치를 관철하고, 기획재정부와 산업부, 노동부 등 관련 부처와 원하청업체의 협조를 강제한 것은 성과다. 아울러 이 진상조사위에 유족과 시민대책위* 참여를 보장하고, 조사대상 역시 이번 사고가 발생한 태안화력 외에 다른 석탄화력 발전소까지 확대한 것도 고무적이다. 애초 정부의 진상조사위 구성안이 노동부 산하기관인 산업안전공단 소관으로 그 권한과 조사대상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에 비해 상당한 개선이다.


산업재해 발생 시 하청업체는 물론이고 원청기관의 책임까지 묻도록 명시한 점과 이번 싸움의 마지막 협의단계에서도 직접적인 책임을 부인하던 서부발전**의 공개 사과를 적시한 점, 원하청 관계에서 고질적인 임금 중간착취 근절 방안을 도입한 점도 진전이다. 투쟁의 구호이자 목표 실현을 위해 재단을 신설하고 재원 출연을 보장받은 것 역시 금액의 규모를 떠나 싸움의 정당성을 입증했다는 의미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온전히 고인의 죽음을 마주한 유족의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상기시켰다.


풀지 못한 과제, 닿지 못한 힘

그러나 이번 투쟁의 주요 요구였던 직접고용 정규직화는 끝내 쟁취하지 못했다. 이보다 한 발 물러난 요구였던 “한국전력 산하 자회사”로의 고용 방안 역시 못 박지 못했다. 특히 △위험의 외주화 중단이 이번 투쟁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였다는 점 △정부보다 공세적인 지위에서 이번 투쟁을 이끌어왔다는 점 △여론의 향방이 부정적이지 않았다는 점 △유족의 투쟁목표 관철 의지가 매우 높았던 점 등을 볼 때, 애초 원안인 직접고용보다 대폭 후퇴한 합의내용은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 외주화 분야인 발전소 경상정비 부문은 일정한 처우 개선에 합의했으나, 이 역시 애초 목표였던 정규직화 및 원가조사서에 따른 적정 임금 지급보다는 후퇴한 내용이었다. 정규직화 논의를 위한 “통합 노‧사‧전문가협의체 재구성” 요구도 한국노총의 반발을 핑계로 대며 책임회피로 일관한 정부를 결국 넘어서지 못했다.


한편 투쟁 초기에는 의제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어려움도 있었다. 이는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발전소 업종 특성 △노동안전 의제로 사태를 국한시키는 협소한 이해 △태안의 지리적 고립성 등의 이유도 있지만, 투쟁 요구를 대중적 언어로 풀어내기 위한 기획 부족의 측면도 상당했다. 시민대책위가 지난 12월 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이후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 위한 진상규명과 정규직화”로 보다 요구를 정식화해 대중적으로 선전한 것은 적절했으나 그 구체적 대안은 여전히 모호했다. 이에 변혁당은 “민영화 철회와 재공영화”를 핵심 대안요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면화하지는 못한 채 과제로 남기게 됐다.


투쟁의 두 변곡점, 지나친 순간들

이번 투쟁에서 반전이 나타난 시점은 1월 22일이었다. 거점을 태안에서 서울로 옮겨 2단계 투쟁에 돌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정부를 움직이고 각계각층의 실천을 추동했다. 다만 그 시점이 다소 늦은 것이 문제였다. 또한 거점이동을 넘어 청와대와 서울 도심에서의 집중투쟁을 배치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 조직화가 힘을 받지 못한 채 시민대책위 대표단 6인의 단식이라는 선도적 투쟁에 의지한 점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투쟁 초기에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추동하는 현장사업이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현장 주체들의 조직화가 미흡해진 상황 역시 뼈아프다. 이는 이후 투쟁 확대와 교섭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투쟁의 파고를 높이고 교섭력을 극대화하는 마지막 열쇠가 결국 현장조직력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변혁당의 기획과 실천

변혁당은 이번 투쟁을 △만연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민영화-외주화에 맞선 재공영화 △생명안전 △청년 불안정노동 등의 문제들이 집약된 사안으로 인식했다. 특히 문재인정부가 임기 중반에 접어든 상황에서 향후 노동정책과 노‧정, 노사관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핵심 쟁점이라는 판단으로 투쟁에 적극 결합했다.


이 과정에서 △주 1회 광화문 분향소 사수 △진보정당 공동 집회 △노동‧사회단체 공동 집회 등을 기획-진행했으며, 1월 22일 2단계 투쟁 돌입과 확대에 힘을 실었다. 투쟁거점을 서울로 이동한 뒤에는 당 대표가 시민대책위 대표자 공동 단식에 돌입하고, 15일간 단식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각 시‧도당별로 동조단식단을 구성해 지역실천을 진행하는 등 아래로부터의 사업도 적극적으로 만들어냈다. 당 학생위원회는 투쟁 초기 청년학생 단체들의 연대활동에 이어 1월 31일에는 학생단위 공동기자회견을 조직하는 등 청년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기에 주력했다.


우리에게 남은 빚, “직접고용-재공영화” 숙제

정부여당의 대책 발표와 노사합의가 이뤄지고 장례를 치른 지금, 정부와 발전소 사측의 태도는 다시 바뀌고 있다. 진상조사위 구성은 총리실과 노동부가 서로 떠넘기며 책임을 미루는 모양새이고, 노‧사‧전문가 협의체 재구성 과정에서 정부의 한국노총 핑계 대기도 여전하다. 자칫 발전소 현장이 다시 고인의 죽음 이전으로 돌아갈까 우려된다. ‘급한 불 껐으니 이제 됐다’는 심산인가.


“내가 김용균이다!” 이번 투쟁에서 가장 많이 외친 이 구호는 고인에 대한 다짐과 더불어 유족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직접고용 정규직화와 기간사업 재공영화 투쟁을 지속해 가야 한다. 위험의 외주화는 ‘위험’의 문제이자 동시에 ‘외주화’의 문제다. 하루에 예닐곱 명씩 1년이면 2천 명의 금쪽같은 목숨이 산업재해로 사그라지는 구조적 원인을 바꿔내는 것과 함께, 정규직화-재공영화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김용균이라는 빛 앞에 우리가 진 빚이다.



* 태안화력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故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 시민대책위원회

** 서부발전은 한국전력의 발전부문 자회사로, 이번 사고가 발생한 태안화력발전소가 소속된 회사다. 과거 김대중정부는 전력 분할민영화 정책 1단계로 한국전력에서 발전부문을 떼어내 여러 자회사(5개 화력발전+한국수력원자력)로 쪼개놓았다. 서부발전은 이 분할된 자회사 중 하나다.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