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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정치꾼들만의 계절’, 반복하지 않으려면

 

 

자유주의 정권의 위기,

사회주의 세력의

존재 증명에 나설 때

 

 

 

이주용┃기관지위원장

이한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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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5년 차를 눈앞에 두고 있는 문재인 정권 지지율(직무 수행 평가)이 40% 안팎에서 등락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이전 어느 정권과 비교해도 임기 말 기준 가장 높은 수치’라며 애써 포장하려 하지만, 3년 전 80%를 넘나들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긍정 평가 여론이 반 토막으로 내려앉은 데 대한 변명으로는 궁색하다. 여당 출신 지자체장 성폭력 사건으로 치르게 된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에서도 정부여당보다 야당 지지율이 현재까지 더 높게 나오고 있다.

 

사회주의 세력이 노동계급의 대안적 선택지로 부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수우익과 자유주의 정권에 차례로 실망하거나 분노한 대중이 집권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선회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 정치지형이 쳇바퀴 돌듯 단순히 기존 보수 여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만도 아니다. 가령 지금은 노무현 정권 말기에 이명박을 위시한 신(新)우익이 부상하며 당시 한나라당에 대중적 지지가 압도적으로 쏠린 상황과 상당히 다르다. 현재 대선 주자 선호도에서 보수야당 인사들은 대부분 한 자릿수 퍼센트 수준의 미미한 지지율에 그치는 반면, 이재명-윤석열-이낙연 등 3자가 20%대 가량의 유의미한 우세를 점하고 있다. 이 3자 각축 현상의 의미는 뒤에서 조금 더 얘기하겠지만, 결국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좀처럼 전통적인 보수당 지지로 대거 돌아서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당장 4년 전 보수우익 정권을 대규모 항쟁으로 무너뜨린 경험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 정치세력 모두에 대한 불신이 조직적 형태로 수렴되지 않는 현재 상황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존재 증명의 시공간을 열어줌과 동시에, 그에 실패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우익적인 대중 정치지형이 형성될 수 있는 위기의 토양이 되고 있다.

 

 

 

윤석열, 이재명, 이낙연

 

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데 낡은 것이 죽지 않고 계속될 때 대중의 환멸은 극대화된다. 앞서 거론한 차기 대선 주자 3강 구도에서 윤석열은 이 ‘환멸’을 표현함과 동시에 또한 그 스스로가 낡은 것의 반복이기도 하다. 가령 보수야권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망령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는(얼마 전 전직 대통령 사면 논란에서도 드러났듯) 가운데 민주당 주축을 장악한 5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조국 사태 등을 거치며 부르주아적 민낯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그러니 이런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 인물’, 특히 정치인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엄정한 국가권력’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윤석열 같은 이가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윤석열의 이런 입지는 과거에도 이회창 등의 인물로 채워진 바 있다. 이회창 역시 전형적으로 ‘기존 정치인이 아니면서 정권에 소신 있게 반대하는 꼬장꼬장하고 대쪽 같은 법률가’로서의 레테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던가? 윤석열과 이회창 같은 인물이 대변하는 것은 정치인으로부터 유리된, 그러나 대중의 접근 역시 철저히 차단하는 국가권력 혹은 그 형태로서의 국가기구일 뿐, 어떤 새로운 이념이나 세력이 아니다. 당장 검찰을 둘러싼 갈등이 한풀 잠잠해지자 그에 대한 지지 역시 꺾이고 있다.

 

한편, 한때 차기 대권 후보 지지율 1위를 수성하던 이낙연은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이재명에게 자리를 내준 데 이어 윤석열에게도 밀리는 형국이다. 이는 현 정권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우경화’로 단정해선 안 될 요소이기도 한데, 이재명은 재난지원금 보편 지급과 기본소득, ‘경기도형 기본주택’ 등 (해당 정책의 효과나 옳고 그름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적극적인 재정 확대를 대중의 삶과 직접 연결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공세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경제위기와 재난 시기에 갈팡질팡 행보만 반복하고 있는) 정부여당보다 ‘훨씬 과감하고 시원하다’는 평가를 기반으로 지지후보 1위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반면, 이낙연은 ‘전직 대통령 사면’ 주장을 먼저 꺼내 들면서 ‘(보수)지지층 확장’은커녕 거대 양당의 담합을 꾀하는 구태 정치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자당 내에서조차 격한 반발에 부닥쳤다.

 

이재명이 ‘포퓰리스트’라는 딱지를 받으면서도 이낙연을 누르고 더 많은 지지를 얻는 것은 대중의 열망이 현 정권의 수준보다 더 좌익적으로 표출될 잠재적 가능성을 드러낸다. 가령 이재명이 이른바 ‘균형재정론’을 앞세워 재정 확대에 부정적 메시지를 계속 내보내는 경제부총리 홍남기에게 직설적인 비판을 가하며 주가를 올리는 동안, 도리어 ‘홍남기가 원칙을 제대로 고수하지 못한다’며 더 강력한 긴축을 시사하는 보수야당은 대선 여론에서 지리멸렬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념적‧조직적 구심 찾지 못한

노동계급 청년층

 

하지만 현 정권을 넘어 급진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대중적 흐름이나 요구는 현재 실체를 갖춘 조직적 형태로 수렴되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세력이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뼈아픈 현실이다. 이러다 보니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은 일관된 이념적 정향을 띠기보다 좌‧우익적 성격이 뒤섞여 나타나는데, 방금 전에 언급했듯 ‘이재명 지지’로 대변되는 흐름도 있지만, 그와 함께 이른바 ‘공정성’ 혹은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등 노동계급 내의 위계적 분할을 공격적으로 지지하는 흐름도 현 정권을 거치며 강력하게 대두했다. 이들은 조직된 노동운동,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는데, 가령 철도-지하철, 학교(기간제 교사, 교육공무직 등 학교 비정규직), 인천공항, 그리고 최근의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요구할 때마다 거센 반대 목소리를 형성했다.

 

일정 부분 과잉대표되는 측면도 있겠으나, 오늘날 ‘공정성’ 이데올로기의 주요 스피커로 호명되는 건 기존 정규직 취업자보다 더 광범위한 취준생 혹은 예비노동자군이다. 게다가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위험이 커 보인다. 이들이 다른 세대보다 ‘특별히 더 우익적’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터져 나온 대규모 투쟁(2008년 촛불, 2014년 세월호 투쟁, 2016년 촛불 등)을 목도하거나 경험했다. 그러나 보수우익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사수‧복원’ 구호를 10년 넘도록 듣고 외쳤지만, 그 결과가 진보를 가장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이라는 게 지금 청년층 민중을 아우르는 집단적 경험일 것이다. 경제적 조건이나 사회구조 변화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할 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정치적 선택지는 ‘개인의 능력과 경쟁’ vs ‘시민운동 세력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축소된다.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대립구도다.

 

계급의식도, 정치적 상상력도, 이념도, 운동의 각종 조직도 쇠락하는 가운데 아이콘 정치나 팬덤 정치처럼 사상적 결속이 과거보다 느슨한 형태의 인물 중심 정치가 펼쳐진다. 이는 한편으로는 지배 이념의 승리임과 동시에 기성 정치세력 모두가 공유하는 위기이기도 하다. 관건은 그 위기를 위협으로 만들어내느냐, 특히 그 위협을 극우의 부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좌파 세력의 등장에 따른 것으로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다.

 

우리의 염원과 달리 촛불항쟁과 그에 뒤이은 문재인 정권 기간 좌파와 노동운동은 이념적‧조직적 구심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노동운동이 19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이후 이념적‧조직적 구심을 구축하지 못한 채 민주당 세력과 한 데 묶인 투쟁에 가랑비에 옷 젖듯 익숙해진 결과다. 중요한 의제나 투쟁에서 또다시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일단 이번만’이라는 생각으로 민주당의 손을 잡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사이, 위력적인 투쟁의 기억을 가진 세대는 쇠락하고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은 독자적인 진영으로 존재하지 못한 채 기세등등한 87년 자유주의 체제에 흡수되어 가고 있다.

 

그렇기에 새로 유입되는 노동계급의 청년층은 자신들의 욕구와 열망을 표출할 조직적 결사체를 찾지 못한 채 자신들에게 강요된 자본주의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말 몇 마디로 이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 결국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세력과 운동이 그들 앞에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면, 혼란과 불만의 틈바구니에서 우익 포퓰리즘, 나아가 파시즘이 자라날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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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은 노동계급의 기억에 각인됐다. 하지만 그 이후 노동운동이 이념적·조직적 구심을 구축하지 못하면서, 위력적 투쟁의 기억을 가진 세대는 쇠락하고 운동은 자유주의 체제에 흡수되어 가고 있다. 사진은 96~97 총파업. 

 

 

 

사회주의 세력,

존재를 인정받아야

 

정권 마지막 해와 대선이 다가오면서 기성 정치권에서는 보수야권 통합 논의 등 이합집산을 비롯해 치열한 세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변혁정치> 다음 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변혁당이 ‘사회주의 대선 후보 운동’을 제안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봤듯 현재 사회주의 세력의 존재 증명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존 진보정당운동이나 이재명 류의 민주당 좌익으로는 노동계급 대중의 불만을 해소할 수 없다. 일례로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는 결과로 보자면 현 정권에 대한 부정 평가의 제1 이유는 부동산 정책인데, 양질의 공공주택을 확대함과 동시에 기존 다주택자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아무리 공급을 늘린다 한들, 지금과 같은 시장주의적 방식으로는 결국 막대한 지불능력이 있는 자가 ‘수요’를 형성하고 새로 공급되는 주택까지 가져가게 된다. 따라서 (이사 같은 아주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 다주택 소유 자체를 금지하고 이를 무주택자에게 배분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사회주의자들 말고는 제출하기 어려운 요구다. 일자리 부족 문제에 관해서도 천문학적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와 기간산업 국유화 등을 통해 국가가 직접 책임지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의 대안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에 처음부터 수많은 사람이 박수치며 몰려들 거라는 환상을 품어선 안 된다. 오히려 비현실적이라고 비웃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이 성장하던 시절과 달리, 사상과 투쟁이 역동적이었던 한 세대가 지나간 지금 사회주의는 ‘언젠가 도래해야 할 좋은 체제’ 정도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황금기가 아니라 태동기를 떠올려보면, 자유주의의 병폐에 대한 저돌적인 공격과 함께 자유주의자들과는 다른 세력과 다른 언어와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일단 증명하는 것에서부터 발걸음을 떼야 할 때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수권세력으로 고려되기 이전에 일단 ‘존재하는 세력’으로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

 

대선처럼 이미 꾸려진 무대에 배우를 올리고, 피상적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를 떠드는 일부터 과감하게 실행하는 게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선거를 앞두고 이낙연이 내민 (자본가의 선의에 기대는) ‘이익공유제’에 대해서조차 ‘사회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이 정치판에서, 대놓고 무엇이 진짜 세상과 삶을 바꾸는 사회주의인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대선을 계기로 사회주의를 밥상머리에 올림으로써 명실상부 실체를 갖춘 정치세력, 기존 자유주의나 진보정당과는 다른 대안세력임을 보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주의 정권의 위기를 우리는 사회주의운동의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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