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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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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08.15 08:16

시지프스 신화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찬물을 끼얹는다고나 할까. 초를 친다고나 할까. 전국적인 96-97년 노동자총파업이 끝나자마자, 연맹 단위나 단위노조 차원에서 이 투쟁을 정리하는 일 중 하나로 영상 작업이 이어졌다. <투쟁의 바다 해방의 바다>*<바위처럼>** 같은 작업들이 그런 것이었다. 승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잘 싸웠고 앞으로도 잘 싸우면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다분히 당시 분위기와는 다른 작업을 한 편 했다. <노동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지?>***라는 당시 고조된 분위기를 살짝 눙친 느낌의 제목을 가진 작업이었다.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이하 현중노조) 제작 의뢰자였다.


부조리한 세상의 시지프스 형벌

현중노조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맨 앞에서 대중투쟁을 벌였던 노조다. 노조가 만들어지자마자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자본과 치열하게 싸워서 간신히 민주노조를 세웠다. 그러나 이 와중에 생긴 여러 가지 문제로 128일 투쟁이 이어졌고, 128일 투쟁에서 생긴 문제로 또 다시 골리앗투쟁이 이어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 듯이 3년여 간 정말 자본과 피터지게 싸웠다. 이후에도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임금과 단협을 두고 파업투쟁을 해 왔다. 투쟁의 결과로 매년 임금도 인상되고 근로조건도 좋아졌다. 노조, 10, 그렇게 지내왔다. 그러나 매년 임금인상 투쟁을 해왔지만, 왠지 항상 투쟁하기 전, 10년 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노동자에게...?>의 출발점이다.

힘들게 바위를 밀어 정상에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고, 다시 내려가서 다시 바위를 밀어 정상에 올려놓으면 다시 내려가고, 끝없이 이것을 반복하는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 시지프스. 어렵게 투쟁으로 임금을 올려놓으면, 물가는 더 올라가고. 또 다시 투쟁으로 임금을 올리면 물가는 두 발짝 도망가고. 거기다가 고용불안에 시달려 투쟁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이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노동자. 시지프스의 처지가 10년간 투쟁해온 노조의 처지 같았고, 노동자의 처지 같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96-97년 투쟁의 여운을 느끼면서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10년간 투쟁해왔으나 언제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모습에 대한 성찰이었다.

 

항상 제자리걸음인 까닭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단락1-사슬처럼, 무엇이 문제이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싸웠는데, 왜 이렇게 나아지지 않지?단락2-노동자는 현대의 시지프스, 구조적으로 분석해보니, 현대자본주의 하에서 임금에 관한 한 노동자는 시지프스가 될 수 밖에 없단 말인가?단락3실업의 거리에서, 자본주의는 더 심화되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까?단락4진정한 승리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지는 사람만이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사슬처럼’, ‘노동자는 현대의 시지프스’, ‘실업의 거리에서’, ‘진정한 승리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단락의 소제목들은 10년차 민주노조의 답답하고 초초한 심정이 잘 묻어났다. 그러나 작품은 단락 소제목만큼 좋지는 않았다. 현중노조 지도부와 활동가들의 치열한 사유(思惟)에 미치지 못했고, 조합원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순전히 노뉴단의 역량 탓이다.

현중노조에는 상당히 일찍부터 조직활동이나 교육활동에 영상을 활용하는 것에 고민이 많고 열의에 찬 명민한 교육부장이 있었다. 골리앗 투쟁이 끝나고 서서히 안정이 되자 그는 현중노조 한 구석에 영상실을 만들고 거기다 장비도 갖추고 영상동아리도 만들고, 조금씩 짧은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는 않았으나 너무나 재미있어 했다. 나중에 보니 그의 성품이 그랬다. 그는 운동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재미있어 했고 보람차 했다. 그의 노력이 <노동자에게..?>을 단순한 뉴스에서 벗어나게, 당위적인 교육물에서 벗어나게, 노동자의, 노동운동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의미심장했다. 96-97노동자총파업, 그것도 승리한 직후에 이러한 암울한 이야기를 대한민국최대 민주노조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선봉에 섰던 노조에서 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96-97년의 시간에서 점점 멀어져가면서 노동자가 느끼는 상황은 87, 10년 전 그 자리가 아니라, 87년 그 이전 너머로, 아니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극도의 고용불안과 노예와도 같은 비정규직의 삶이 노동자의 보편적인 자리가 됐으니까.

  

* <투쟁의 바다 해방의 바다> 19974/32/제작: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노동자뉴스제작단

** <바위처럼> 19976/24/제작: 전국지역의료보험연합-노동자뉴스제작단

***  <노동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지?> 19975/36/제작: 현대중공업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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