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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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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제개편으로 차별을 철폐하라!”

1989년 서울지하철노조 3.16파업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민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하는 서울지하철 노동자들(1989.3.17.)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새벽 5시경 갑자기 군자기지에 어둠이 깔리고 적막이 감돌았다. 전기가 끊긴 것이다. 바늘을 대면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을 가르는 위원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동지 여러분, 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를 강화하고 더욱 힘찬 투쟁의 노래를 부릅시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625, 콩 볶는 소리가 나더니 하늘에 별같이 최루탄이 퍼지고 지랄탄이 춤췄다. 불도저를 앞세우고 순식간에 전투경찰이 밀려들었다. 2,345명이 연행되고 200여 명이 중경상을 당하며 상황은 30분 만에 끝났다. 자본과 정권은 1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지하철 군자기지를 포위하고 최루탄 2천 발을 쏘아가며 살육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서울지하철노조 30년사> 중에서)

조합원들은 서울시내 경찰서로 분산 수용되었다가 훈방되었다. 2, 3차 집결지로 예정되었던 곳은 이미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되었다. 누군가 야당 당사로 가자고 했고 소식을 전해들은 조합원들은 민주당사로 모였다. 민주당사가 좁아 평민당사까지 지하철 노동자들로 꽉 찼다. 농성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서울 지하철 운행은 파행을 겪었다.

 

투쟁의 불씨-기능동물 철폐 요구

지도부가 잡혀갔어도 지하철 노동자들이 멈추지 않고 자발적인 투쟁을 전개한 까닭은 무엇일까.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은 1987노동자대투쟁이 뜨겁게 타오르던 812일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군자, 지축, 창동 기지에서 열린 설립보고대회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설립은 자본과 정권을 긴장하게 했다.

노동조합 설립 당시 핵심 요구는 군사문화 철폐와 직제개편이었다. 이는 이후 몇 년 간 노조와 서울시, 정권의 첨예한 대립 지점이었다.

당시 서울지하철 직제는 일반직, 기능직, 고용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지하철공사의 인원 구성을 보면 85%이상이 기능직이었다. 역무원, 승무원, 차량정비원, 시설과 기계 설비를 점검하고 관리하는 기술직원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일반직이라 불린 본사 직원들은 보조적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기능직은 일반직과 임금, 승진 등에서 차별 받았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분노를 산 것은 일반직이 마치 기능직과 고용직 위에 군림하는 지위를 보장받았다는 점이다. 식당 이용, 작업복에서 차별이 그대로 드러났고, 사장은 조회시간에 보리밥이 어찌 쌀밥과 같아질 수 있냐는 발언을 하곤 했다. 공사는 일반직을 앞세워 노동자를 통제했던 것이다.

여기에 지하철공사의 군사문화가 더해져 노동자들을 숨 막히게 했다. 서울지하철 초대 사장이 광주항쟁 당시 육군 작전참모부장이었고, 임원급 7명 중 5명이 군 장성 출신, 과장·계장까지 군 출신 특채자 판이었으며 본사 타자원까지 여군 출신이었다. 이들에게 군대문화는 자연스러운 조직 운영방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깨기 위한 노동조합 설립은 필연적인 것이다.

지하철노조는 설립과 동시에 차별 철폐를 위한 직제개편 투쟁을 시작했고 198711월 직제개편 양해각서, 19886월 양해각서 이행을 위한 합의각서, 198810월 직제개편 합의각서 합의문을 체결했고 19893월 합의각서 전면 이행 절차에 관한 협의를 했다. 하지만 공사는 시의 결정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번번이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1989년은 노동과 자본·정권 사이 대립을 피할 수 없는 해였다. 전국조직 건설로 향해 전진하던 노동자를 자본과 정권이 그대로 둘 리 없었다. 전국 곳곳에서 투쟁이 일었고 곳곳에 경찰병력이 투입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 투쟁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 노동자들은 야당 당사 농성을 정리하고 복귀하지만 직재개편이 실현되고 근무형태도 일정 변경되는 성과를 쟁취했다. 그리고 조합원들은 투쟁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자본과 정권에 대한 의식이 성장했으며 현장에 본격적인 정치교육이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학습그룹이 생겨났다. 3.16파업 경험은 지하철노조의 10년을 투쟁으로 이끌 수 있었다.

 

투쟁 속에 지하철 노동자도 그들의 요구도 하나였다.

지하철노조가 설립되고 직제개편 투쟁을 하는 과정에 노동자는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고용직이었던 이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하고, 고용직 철폐를 이루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매점에서 일하던 이도 청소하던 이도 모두 조합원이 되었고, 일반직과 기능직·고용직으로 나뉘었던 직제는 개편되었다. 업무직 정규직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상황과 30년 전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투쟁 속에 요구를 통일시켜가는 과정을 돌아보며 자본의 분할 통제에 맞설 수 있는 우리를 회복할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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