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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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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에 쓰는 물건인고?’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시작은 그 일이 끝나던 1999년으로부터 5년 전에 있었다. 3살 된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보내놓고 복귀했을 무렵, 현대중공업 노조는 아주 젊은 노동자가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이 젊은 위원장은 노뉴단 창립 첫해에 만든 <건설 전노협2>에서 울산의 전노협 건설 열기를 전해주는 울산 노동자 리포터였다. 막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온 것 같은, 풋풋함과 장난기가 얼굴 가득 서려 있는 노동자로 패기만만했다. 그러나 그는 안녕하십니까?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교선실장 000입니다20번 넘게 NG 낼 정도로 카메라 울렁증이 무척 심했다. 위원장이 된 그가 조합원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여긴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했던 ‘87년 대투쟁과 이어지는 파업투쟁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되돌아볼 수 있길 그는 바랐다.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현장을 뒤바꾸는 작업

노동조합 역사를 영상으로 정리하는 사업을 기획했던 94년 말에 현대중공업은 자본이 신경영전략을 그 어떤 사업장보다 빠르게 착수한 곳이었다. 현대중공업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시작과 마무리를 한 곳이었고, 이후 매년 파업과 선도투쟁이 이어졌던 곳이었다. 그 덕분에 현중 자본은 다른 자본보다 한 발 앞서 노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노동조합이나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물리적인 탄압보다는 현장을 장악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장의 각종 향토모임 또는 문화모임들과 조-반장 체계를 촘촘하게 엮고 세세하게 꿰뚫으며, 현장을 자본의 생각으로 점차 물들였다. 선진활동가들은 이내 현장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고, 젊은 노조위원장 역시 누구보다 예민하게 이를 알아차렸다. 노동이 현장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몇 년 전의 그 뜨거웠던 투쟁을 다시 소환한 것이다. 그것도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더 생생하게.

노조 역사의 비디오 제작은 그렇게 시작됐는데 도중에 기획이 크게 바뀌었다. 노조 창립기념품으로 됐고, 그에 걸맞게 단 한 편이 아니라 총 세 편으로 뻥튀기가 된 것이다. 2만 조합원에게 세 편의 비디오, 6만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제작배포하는 기획이 됐다. 그러나 이 기획은 쉽게 실현되지 않았고, 우리는 이 뻥튀기 기계를 팔이 떨어지도록 돌렸다! 5년 동안.

 

불판에 밀린 87대투쟁 영상

1<노동자>*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는 큰 에피소드를 둘러싸고, ‘왜 투쟁에 나섰는지?’ , ‘87년 대투쟁을 되돌아봐야 하는지?’라는 현재적 의미를 짚는 일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이 현재적 의미가 작품에 녹아들길 희망하면서 이전까지 한 번도 구사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작품 구성을 시도했다. 이 작품을 만드는 시점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의 하루를 카메라에 담아, 그 하루와 현대중공업이 생긴 72년에서부터 87년까지 15년의 역사를 교차 구성했다. 현재 시점의 노동자가 공장으로 출근해서 오전 일을 하는 단락이 끝나고 나면, 1972년 현대중공업을 건설하는 과정과 당시 노동자의 노동조건들이 나오는 단락이 이어지는 식이다. 신선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하루에는 당시 현중 노동자의, 한국 노동자의, 민주노조운동의 보편적 고민과 과제가 녹아있지 못해 현재적 의미보다는 풍경 묘사에 그친 아쉬움이 있다.

1부가 완성됐으나 이 사업이 창립기념품으로 될 전망이 낮아지면서 2부와 3부의 제작도 어정쩡하게 4년여를 끌었다. 그동안 <노동자>는 상영을 하지 못했다. 이 사업은 집행부가 바뀌면서 다음 집행부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새로운 집행부는 이전 집행부에서 벌인 이 뻥튀기 기획을 한 편의 비디오로 줄여서 마무리하자고 했다. 그러나 1부가 3부의 한 편으로 이미 완료된 상태였고, 2편의 촬영도 끝나 편집만 남은 데다가, 3편 역시 제작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만큼 제작비도 너무 많이 들어간 상태였다. 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이미 자본의 색깔로 물들어가고 있는 현장 속에서, 투쟁으로 얼룩진 역사 비디오를 한 편도 아닌 세 편이나 들고 서서, “이게 뭐에 쓰는 물건인고?”라고 묻는 조합원들에게, “불판보다 나은 거예요라고 노동조합은 선뜻 이야기하지 못했다. 당시 조합원들은 노조 창립기념품으로 삼겹살을 맛있게 굽는다는 불판을 좋아했다.

 

* <노동자>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사 3부작, 미포만의 붉은 해 (1) : 1995/ 74/ 제작 : 현대중공업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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