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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세력에 의한 평화협정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배성인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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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월 소설가 한강이 뉴욕타임즈에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기고를 통해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말하는 미국을 비판한 지 불과 1년도 안 된 2018612. 나란히 나부끼는 인공기와 성조기 앞에서의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은 묘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림이었기 때문에 둘의 케미가 신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내의 냉전주의자들과 미국의 반트럼프 세력들은 합의문이 공개되자 새로운 것이 없다며 무수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들에게 북한은 타도와 붕괴의 대상이었기에, 확실하고 구체적인 약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 4·27판문점 선언과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북한 비핵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적대관계는 근본적으로 청산될 것이며, 이는 동북아 신 안보질서의 형성으로 귀결될 것이다. 오늘날 동북아 안보질서의 출발점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허물어지고 한반도 평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행과정에서 각종의 불협화음과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주변국의 이해관계는 상이하고 미-중간 패권경쟁의 파고도 여전히 높은 현실이다.

 

미국의 세계전략이 평화협정 거부의 근본적 요인

한반도 평화체제는 남북의 군사적 긴장과 대결로 전쟁불안을 종식시킬 수 없었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참여 여부가 변수이지만 판문점 선언에서 약속한 종전선언을 다가오는 7월에 남··미 세 국가가 먼저 하고 이후 중국이 참여하는 4자 회담을 통해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밟을 수도 있다.

물론 종전선언과 종전을 논의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종전선언은 그 자체로 법적 효력은 없는 다분히 정치적인 선언이다. 그런 만큼 종전선언만으로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전망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상태를 보장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종전이 되려면 정전체제를 관리해온 유엔사령부 해체, 바다·육지에서의 경계 획정, 주한미군 주둔 여부와 그 성격 규정 등 비핵화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문제는 1954년 제네바 회담을 비롯해 그동안 여러 차례 제기됐으나 실질적인 협상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평화협정을 요구했지만, 미국이 평화협정을 조인하거나 북한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남한의 지배세력과 미 제국주의는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을 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지지 못하는 근본적 요인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미국은 정치적·이념적으로 북한을 적대시하면서 감시와 통제 그리고 압박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에 수십 년 동안의 군사적 압력과 경제봉쇄를 강화했고, 남한에 대규모 군사력을 주둔시켜왔다. 소련과 동구권 몰락 이후에는 주한미군의 성격과 역할이 중국 견제와 봉쇄로 바뀌면서 평화협정을 거부했다. 핵심은 미국의 세계전략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로서 미국이 북한의 양해 하에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고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해도 이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주한미군 철수를 교환할지, 그리고 주한미군 없이 중국을 어떻게 견제할지 흥미진진하다.

 

평화협정 체결로 전쟁을 종식할 수 있을까

평화협정은 국내법과 국제법의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다고 해도 이를 준수한다는 보장은 없다. 국제정치는 무정부상태이기도 하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기 때문에 법과 제도는 행위자에 의해서 자주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제정치사에는 적대국가들 간에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를 이끈 성공적 사례들도 있지만, 평화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간 사례도 적지 않다.

평화회담 성공 사례로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문제로 발발한 국제전쟁인 ‘30년 전쟁의 종전과 함께 16481024일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Treaty of Westphalia이나, 2차 대전 후의 파리강화조약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를 만들어 낸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 미소 냉전체제 종식을 선언한 1989년 몰타회담, 1993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맺어진 평화협정, 보스니아 내전을 종식시킨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 등이 있다. 최근에는 2014년 필리핀 정부와 이슬람 반군조직 사이 맺어진 이슬람해방전선평화협정이 있다.

평화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재발한 사례는 1938년 히틀러의 독일과 영국 체임벌린 수상이 합의한 뮌헨회담, 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체결한 1993년과 1995년의 오슬로 평화협정 등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3년과 1995, 서로를 인정하기로 한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협정 당사자들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 그리고 시몬 페레스 외상은 이 결과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라빈 수상은 이스라엘 내 반대세력에 의해 암살됐고, 팔레스타인 내에서도 하마스와 파타 등 강경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오슬로 평화협정은 무력화됐다. 그 결과 지금도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세력 간 유혈사태는 끊이질 않고 있다(박영준, ‘성공한 평화회담, 실패한 평화회담’, <한국일보>, 2018613.).

이처럼 많은 사례를 통해서 평화협정이 항구적인 평화를 결코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평화협정의 주체와 성격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의 경우는 미중 제국주의 사이의 충돌과 대립을 고려할 때 대단히 위태로운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국제적 법과 규범 그리고 제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국제정치에서 평화와 질서의 가능성을 기존 강대국들 사이의 세력균형이나 패권국가인 미 제국주의 지배 자체에서 찾았다. 따라서 평화협정 자체를 동의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 내용과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강대국들사이의 이해관계에서 추진되는 평화협정에 대해 냉철한 자세가 요구된다.

 

노동자민중이 주체가 되는 평화협정

한반도 평화체제는 남··미 상호 관계를 넘어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동북아 평화조약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남북 간 상호 신뢰와 공존을 바탕으로 군축, 외국의 군사개입금지, 군사적 비동맹, 외국군 철수, 비핵화, 북미·북일 수교, 냉전구조의 해체 등이 이행되어야 진정한 평화체제가 완성되는 것이다. 국제적 조약을 깨는 측은 고립과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한반도에서의 그 어떠한 군사적 대결도 남북의 공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주변국의 군축과 비핵화도 이끌어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질서에 내재하는 모순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국제적 갈등과 협력은 제국주의적 갈등이나 아니면 초제국주의적 협력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변혁속에서 국제적 평화와 참다운 질서의 가능성을 찾았다. 이러한 가능성을 관념적이라고 비판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로 관념에서 과학으로 점점 그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노동자민중이 주체가 되는 평화협정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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