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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게 사회주의가 필요한 이유


박회송┃울산



‘사람의 몸에 고기처럼 등급을 매기지 말라!’ 오랫동안 장애인들은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며 싸웠다. 장애인 관련 예산을 제한적으로 편성하고는 등급에 따라 복지에 차등을 두면서, 많은 장애인이 생존과 기본적인 활동에 필요한 도움조차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공약한 바에 따라 올 7월부터 장애등급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장애인들이 투쟁을 벌이던 광화문 농성장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직접 찾아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도 장애인들은 4월 20일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에 투쟁에 나선다. 정부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6개로 구분하던 등급을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기존 1~3급)과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기존 4~6급)으로 이원화하면서, 등급을 매기는 것 자체는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주요 서비스 수급 자격을 결정하는 별도 심사도 받아야 한다. 장애인들이 보장받아야 할 활동 지원 서비스는 예산 제약 등의 이유로 실제로는 그다지 확대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과연 장애등급제를 완전히 폐지하려 하는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올해 4‧20 장애인 차별 철폐 공동투쟁단의 요구가 장애등급제 완전 폐지와 24시간 활동 지원 보장, 부양의무제‧장애시설 완전 폐지 등 그동안 외쳤던 것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릴 때는 집에 있다가, 크고 나면 시설로”


장애등급제의 뿌리는 과거 나치 독일에서 찾을 수 있다. 나치는 장애인에게 등급을 매기고 A급 장애인을 학살했다. 나치가 보기에 장애인은 노동력으로 착취할 수 있는 여지가 적고, 유전적으로도 열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치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가 바라보는 장애인의 존재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장애인은 자본의 관점에서 노동력과 수익을 뽑아내는 데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격리돼 시설에 갇혔다. 자본주의가 팽창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 장애인은 인간으로 대우받지도 못했다. 일부는 서커스단이나 동물농장처럼 구경거리 신세로 전락하는 비극도 벌어졌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산업이 한창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혹독하게 노동력을 착취하던 60년대, 발달장애인과 뇌병변장애인들은 밖에 나올 수 없는 시설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80년대까지도 그대로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수많은 발달장애인과 노숙자들을 강제로 끌고 와 집어넣고는 폭행과 고문,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며 잔혹하게 인권을 유린했던 것이다.


어릴 때는 집에 있다가, 크고 나면 시설에 가는 게 우리 장애인들의 삶이었다. 90년대부터는 장애인들이 일부 혜택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와 함께 장애등급제가 도입됐다. 이 혜택은 전기세나 통신비, 자동차세 같은 것이었는데, 장애인 당사자보다도 주로 그 가족이 받았고 여전히 많은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활동 보조인 사업이 시작되며 사정이 변했다. 활동 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면 장애인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장애인들이 밖에 나와 살 수 있으려면 당연히 더 많은 국가 예산이 필요했다. 이전까지는 조세 혜택만 주다가, 이제는 활동 보조인 고용 등을 위해 국가가 직접 예산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가 장애인 복지 예산을 확충하지 않으면서, 장애등급제의 문턱 자체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애초에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을 까다롭게 만들면서 거기에 드는 돈을 아끼겠다는 심산이었다.



장애인을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드는 건 자본주의다


최근 탄력근로제나 최저임금 개악 시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 문재인 정부는 자본가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자본은 이윤을 얻지 못하면 투자할 유인이 없다. ‘수익으로 돌아오지 않는’ 복지에 돈을 투입하기 싫어한다. 10여년 전, 장애인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대해 가장 반대했던 게 바로 경총과 전경련이었다. ‘기업 현실에 큰 부담’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결국 ‘장애인은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본의 신념을 반복한 것이었다. 지금도 노동부 장관이 승인하면 장애인에게는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에서 과연 장애인이 해방될 수 있을까. 이윤 축적이 제1의 존재 이유인 자본주의에서 장애인들은 ‘필요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물론 장애인을 소비자로 만드는 미국식 접근법도 있긴 하다. 가령 장애인 개인에게 돈을 주고, 알아서 그 돈으로 소비도 하고 활동보조 서비스도 구매하라는 식이다. 이때 장애인은 소비를 통해 기업의 수익을 만들어주는 ‘고객’이다. 이 입장에서는 심지어 장애인이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이 돈을 도박으로 몽땅 낭비해도 ‘그건 그 사람의 자유’라고 말한다. 자본에게는 장애인의 돈인지 비장애인의 돈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 ‘사회적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의 장애인’이나 ‘장애인의 사회적 활동을 보장하는 국가’라는 개념은 없다.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하고 지출해 기업에 수익을 제공하게 하는 ‘소비자 만들기’가 있을 뿐이다.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보조 서비스 24시간 보장, 장애인시설 완전 폐지. 이 4가지는 장애인의 생존과 존엄을 위한 절박한 요구지만, 이윤을 앞세운 자본주의에서 결코 온전히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에겐 다른 세상이 필요하다. 사람에게 등급을 매겨 한 푼의 비용이라도 줄이려는 데 급급한 이 체제가 아니라, 진정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다를 바 없이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보장하는 세상. 수익성과 자본의 효율이 아니라 구성원의 필요가 사회의 근간이 되는 세상. 장애인에게 사회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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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진정한 장애인 자립과 해방, 사회주의가 제시한다


우리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장애인시설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그저 제도들을 없애는 게 목적이 아니다. 장애인들이 △‘매겨진 등급’이 아니라 ‘각자의 필요’에 근거해 △격리시설에 갇히지 않고 차별 없는 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활동 보조 서비스를 비롯한 제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즉, 장애인의 자립 생활은 장애인 운동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장애인 자립 생활 운동은 처음엔 고등교육을 받은 장애인 등 다소 엘리트 출신 중심으로 이뤄졌다. 기숙사를 비롯한 대학 시설에 대한 장애인 접근권이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이 운동을 촉발한 것이다. 반면 일본이나 한국의 장애인 운동은 민중에게서 비롯됐다. ‘시설과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장애인들의 외침은 2000년부터 시작한 이동권 투쟁으로 나아갔고, 2006년부터는 장애인 자립 운동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자립 생활 운동의 조류 가운데는 미국식 시장 논리를 주장하는 흐름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처럼 장애인 개인이 활동보조사를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대신 장애인 본인이 결정과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한다. 언뜻 장애인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결국 활동 보조 서비스 공급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삭제하고 장애인들이 각자 알아서 구매하도록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더군다나 활동보조사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철저히 자본주의적 방식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헤게모니를 넘어서기 위해선 사회주의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자립생활운동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자립생활운동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책임을 근간으로 한다. 이 공동체는 무엇보다 첫째로 장애인 노동권을 보장할 것이다. 이윤 창출이 목적만 아니라면, 중증장애인도 얼마든지 자신의 발전을 위해 충분한 대가를 받으며 노동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이 공동체는 시장논리가 아니라 장애인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재화와 서비스를 공적으로 제공할 것이다. 지금은 장애인들이 무언가 필요해도 돈이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원활한 생활이 어렵다. 반면 노르웨이만 해도 중증장애인의 경우 본인에게 맞는 휠체어를 제공한다고 한다. 셋째, 활동보조 서비스를 국가가 책임지고 필요한 장애인에게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그러면 활동보조사 노동자들도 안정적으로 일하면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공동체와 장애인 본인이 조율을 통해 활동보조사를 배치한다면, 장애인의 선택권과 자유도 보장할 수 있다.


지난 2012년, 한 장애인과 활동보조사의 우정을 다룬 프랑스 영화 <언터처블: 1%의 우정>이 국내에서도 개봉해 상당한 흥행을 거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 스토리를 전달하려 했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장애인은 상위 1% 부유층이다. 대부분의 장애인은 영화 속에 나오는 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는 부유층, 자본가가 아닌 장애인이 대다수다. 우리에겐 장애인들이 주체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해 당사자들이 직접 토론하고, 노동하고, 주택도 배분하면서 활동보조사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격리되지 않는 자립 생활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가로막고 있는 진정한 장애 해방의 미래, 우리는 그것을 연구하고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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