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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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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Ⅱ 군산형 일자리


산업 평화라는 환상

노동이사제, 노사 공동결정제도의 함정


한상규┃서울



광주형 일자리든 군산형 일자리든, 정부는 노동권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노동자의 경영 참가’를 제시한다. 교섭권과 쟁의권은 ‘상생’이라는 미명 하에 노‧사‧민‧정 협의체(사실상 자본과 정부, 지자체가 결탁하는)에 헌납하고, 그 대신 ‘노동이사제’ 같은 제도를 도입해 ‘노동자도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상생과 화합의 노사관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조차 제대로 지켜질지는 미지수다. 가령 광주형 일자리의 경우 올 1월 투자 협약을 체결하고 지난 9월 “광주글로벌모터스”라는 이름의 법인 설립 등기까지 마쳤지만, 결국 노동이사제 도입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광주형 일자리 투자자인 현대차가 노동이사제 도입에 극력 반대하고, 지자체인 광주광역시 측도 현대차 입장을 쫓으며 이용섭 광주시장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국노총 광주본부가 사업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노동이사제, 나아가 노사 공동결정제도는 노동자 대표가 기업 이사회에 이사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거나, 기업(사업장) 차원에서 노동자 대표가 사측과 더불어 노동조건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과 관련한 것들까지 함께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을 보장하는 제도로, 그 주요한 기원은 독일에 있다. 독일에서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의 도입 및 확산은 1·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당시 상대적으로 강했던 노동계급의 힘, 그리고 동독과 맞닿은 ‘자유진영의 최전선’이라는 지리적 조건 등이 고려된 결과물로서 가능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이사제 도입을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걸었고, 광주형 일자리를 비롯한 각종 ‘문재인형 일자리’를 추진하면서 노동이사제와 더불어 노사 공동결정제도의 도입이 거론되기도 했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은 일찌감치 서울시 산하 공공부문 사업장에 노동이사제 도입을 추진해왔다. 이들이 노동이사제나 노사 공동결정제도를 추진하며 제시하는 명분은 ‘일자리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 혹은 ‘선진적인 노사문화 정립’ 같은 것이다.



‘노동자 경영참가’, 운동진영 논쟁조차 사라진 현실


노동운동 진영 차원에서 보면, 전노협 이후 민주노총이 탄생한 이래 산별노조의 정착과 더불어 독일식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의 도입은 노동조합운동 내 헤게모니 세력에게는 주요한 목표이기도 했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제도적 안착과 노동자들의 권리 확장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주형 일자리를 비롯한 각종 ‘○○형 일자리’를 둘러싸고 민주노총 내 찬반 논쟁은 존재해도,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에 대해서는 적어도 헤게모니 세력 내 찬반 논쟁은 없다.


자본가들은 물론이고 친자본‧보수언론은 경영권 침해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 도입을 반대한다. 보수 정치세력과 더불어 이들은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사회주의’라는 낙인을 찍고 있는데, 노동이사제나 노사 공동결정제도는 그 낙인찍기의 좋은 대상이 된다.


그런데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르는 요소가 아니다. 다만, ‘영국·미국형 자본주의’라 불리는 주주자본주의 모델과 ‘유럽형 자본주의’라 불리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을 가르는 정책적 요소일 뿐이다. 교과서적으로 보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법인)을 소유한 주주의 이익 극대화를 가장 중요시하는 주주자본주의와 달리, 기업과 관련된 여러 이해관계자(주주뿐만 아니라 경영자, 노동자, 소비자 등등)의 이익을 고려하고 협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모델이다. 이 모델의 근본에는 ‘노동과 자본의 협력을 통해서 산업평화와 더불어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서 노동운동 진영 일부와 몇몇 학자들은 ‘산업평화’를 ‘산업민주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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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약화된 독일 노동계급


일단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독일에서 도입된 상황과 조건의 맥락을 보면, 현재 한국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전 시기 서독은 자유주의 진영의 ‘쇼윈도’ 역할을 수행했다. 그만큼 ‘노사협력체제 하의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유주의 진영과 서독 정부 차원에서는 이 정책들을 자본에 요구할 수 있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했던 자본 측도 그러한 타협을 통해 ‘변신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편 사민주의 헤게모니 하의 노동운동 진영도 상대적으로 강력한 자신들의 조직된 힘을 바탕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해나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흘러온 독일의 상황을 보면, 도입 당시에 보장되던 노동계급의 권리와 노동운동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반면 한국은 이미 경제가 고도로 성장한 상태이고, 특히 최근에는 자본 축적의 위기와 함께 기술 발전에 따른 산업의 변화와 재편, 그리고 일자리 위기가 불거진 상황이다. 게다가 노동운동의 힘이 과거 독일을 비롯한 서구에 비해 미약한 상황에서, 정부가 일자리를 볼모로 ‘산업평화’라는 미명 하에 노동이사제 등 모종의 ‘노동자 경영참가’ 도입을 추진하는 것이다. 노동운동 내 헤게모니 세력은 정부가 이를 ‘변형된 형태’로 추진하려는 것에는 경계하지만, 궁극적으로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노동자 경영참가’를 ‘변형된 형태로 추진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노동이사제나 노사 공동결정제도 자체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키느냐 강화시키느냐, 사회를 변혁하는 데 이바지하느냐 아니냐를 따져야 한다.


독일에서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동독과의 통일, 경제 위기, 이주 노동자의 증가 속에서 독일 노동운동은 조직된 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일자리와 이해관계를 부분적으로 지키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이조차 고용형태, 임금, 노동조건 등에서 자본에게 상당한 양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사민주의의 실패와 극우의 부상 등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유럽연합 내에서 경제권력을 쥐고 있는 독일 자본주의의 현상 유지를 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유럽 국가 노동자 민중의 희생이 강요되는 상황에서도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나아가 자본주의가 가속화시킨 생태 위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가 개별 기업 내에서 노동조합의 힘을 간신히 유지하는 데에는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제도를 통해서 독일 노동조합운동이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 이주 노동자들, 독일에 의해 압박을 받고 있는 취약국가 노동자 민중, 나아가 자본주의가 불러온 생태 위기에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독일에서 ‘노동자 경영참가’는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시키지 못했고, 사회를 변혁하는 데 이바지하지도 못했다.



자본의 책임을 노동이 뒤집어쓰라는 함정


한국의 경우 광주형 일자리 추진 과정에서 본 바와 같이 정부와 자본은 노동조합 무력화, 노동 유연화, 노동강도 강화 등을 전제로 ‘일자리와 경영 참여를 보장해주겠다’고 한다. 설령 노동자 경영참가를 독일식으로 도입한다고 해도, 한국에서는 조직된 노동의 힘 자체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경제 위기 국면에서 노조가 경영의 공동책임자가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미조직 노동자들의 배제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가령 구조조정의 결정과 수행에 있어 자본과 협력함으로써 조직된 노동자들의 불신과 분노 역시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된 노동자 사이의 분열뿐만 아니라 조직된 노동자 사이의 분열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과 자본은 구조적으로 비대칭적 관계에 있다. 근본적으로 ‘산업평화와 자본주의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노동과 자본이 협력한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다. 자본 축적의 모순에 따른 경제 위기의 비용과 고통을 자국 내에서든 다른 나라에서든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겨야만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다.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넘어설 수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노동이사제와 노사 공동결정제도는 자본주의 정책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와 기업을 살리고 자본과 공존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다. 이 제도는 노동에게 ‘자본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자본에의 협력’을 강제하게 되고, 결국 자본의 거수기 또는 공모자가 되도록 만든다. 우리에게는 노동의 조직적 힘을 강화하고,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같은 노동계급의 배제가 아니라 단결의 강화를 가져올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야기한 생태 위기를 극복하고, 노동자 민중에게 고통과 책임을 떠넘기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산업평화 또는 산업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은 ‘산업평화’라는 환상을 쫓다 노동이사제, 노사 공동결정제도라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