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84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4.16 16:20

호박벌



마을 사람들과 꽃전, 나물전을 부쳐 먹기로 했다. 진달래꽃을 따러 야트막한 마을 뒷산에 오르니, 불긋불긋 진달래꽃이 활짝 폈다. 청딱따구리 소리, 멧비둘기 소리에 꽃을 따며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소리가 섞이니, 숲이 제법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진달래꽃 둘레가 조용하다.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배고픈 온갖 벌레들이 꽃에 바글바글 몰려와서 잉잉 붕붕거리며 떠들썩해야 할 텐데 조용하다. 이런 게 레이첼 카슨이 얘기했던 침묵의 봄인가? 진달래꽃을 따며 한껏 들떴던 마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호박벌 한 마리가 진달래꽃 속을 파고들다 사람 기척에 놀라 붕붕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호박벌은 덩치가 꿀벌보다 두 배쯤 큰 벌인데도, 말벌처럼 무섭기보다 귀엽고 친근감이 가는 벌이다. 덩치 큰 털북숭이 호박벌이 뒤뚱거리며 꽃 깊숙이 있는 꿀을 찾아 머리를 들이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어릴 적엔 큼직한 호박꽃에 들어간 호박벌을 꽃을 오므려 잡아서 놀았다. 호박벌이 꽃 속에 갇혀 날갯짓하며 내는 붕붕거리는 소리는 정말 컸다. 동무 귀에 갖다 대서 놀리기도 하며 놀다가 꽃잎을 벌려 놓아주었는데 호박벌에 쏘인 기억이 없다. 호박벌도 독침이 있지만, 성질이 온순해서 잘 쏘지 않는다.


호박벌이 날면서 내는 붕붕거리는 소리가 우렁차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소리로 알 수 있다. 꽃 속으로 파고드는 호박벌을 보면 큰 몸짓에 견주어 날개가 아주 작다. 작은 날개로 날려니 날갯짓을 더 힘껏 빠르게 할 수밖에 없을 테고 나는 소리도 더 크게 나는 것이다. 호박벌은 꽃 속에서도 붕붕거리는 소리를 내는데 꽃은 그 소리에 자극을 받아 꽃가루를 쏟아낸다고 한다. 붕붕거리는 소리와 떨림은 가장 꽃가루받이를 잘하는 호박벌이 왔다는 신호인 것이다.


막 꽃피기 시작한 벚나무에서 꿀벌도 몇 마리 보았다. 꿀벌과 호박벌은 둘 다 꽃 꿀과 꽃가루를 먹으면서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호박벌은 털이 더 많고 꽃 속에 더 깊이 파고들기 때문에 꿀벌보다 꽃가루받이를 하는 데 더 낫다. 게다가 호박벌은 꽃 꿀이 없어서 꿀벌이 찾지 않는 토마토나 가지같은 가지과 식물의 꽃에도 날아온다. 토마토 비닐하우스 농사엔 호박벌과 같은 뒤영벌 무리에 속하는 서양뒤영벌을 풀어서 꽃가루받이를 했다. 뒤영벌이 없으면 사람이 일일이 면봉으로 꽃가루를 꽃의 암술머리에 묻혀 주어야 한다. 서양뒤영벌과 습성이 같은 호박벌 배양에 성공해서 이제는 호박벌도 농가에 보급되고 있다. 호박벌은 시설 하우스 일을 돕는 일꾼이 되었다. 비닐하우스나 유리온실과 같은 시설 하우스 안의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하다. 덥고 습한 데다 하우스 밖과 온도 차이가 많이 나고 농약이 뿌려져 있어서 하우스 안에서의 작업은 만성적인 감기와 팔다리 허리통증, 현기증, 두통, 호흡곤란을 일으킨다. 이른바 하우스 병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벌들도 한 달 쯤 뒤면 대부분 죽는다고 한다.


호박벌과 생김새가 닮은 벌이 있다. 호박벌과 닮아서 이름도 어리호박벌이다. 호박벌보다 조금 늦게 4월 말이나 5월 초쯤 나온다. 어리호박벌은 호박벌과 생김새는 닮았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영 딴판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호박벌과 달리 어리호박벌은 혼자 살아간다. 죽은 나무 구멍을 파고 여러 개의 알을 낳는다. 그런데 이렇게 구멍을 파는 기술은 꿀을 훔치는 데도 쓰인다. 덩치가 커서 꽃 속 깊이 있는 꿀을 먹기 힘드니까 자주 꽃 겉에서 꿀주머니에 바로 구멍을 내고 꿀을 먹는다. 이렇게 구멍을 내고 꿀만 먹으니까 꽃가루를 묻히지 않게 되고 꽃가루받이도 되지 않는 것이다. 호박벌은 힘들어도 꽃 속을 파고들어 꿀을 먹지, 꿀주머니에 구멍을 내지 않는다. 꿀이 없는 꽃에도 날아와 꽃가루만으로 만족하며 꽃가루받이를 돕는다.


꿀벌과 호박벌은 닮은 점이 많다. 꽃가루받이를 잘 도와주는 게 닮았고 사회생활을 하는 게 닮았다. 꿀벌과 호박벌은 최근에 그 수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도 닮았다. 이상기후, 농약 살포, 바이러스, 기생충 따위가 원인인 것도 같다. 어쩌면 침묵의 봄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어느 봄날 호박벌과 꿀벌이 사라진다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84_벌레이야기_호박벌_수정.jpg



글‧그림 강우근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