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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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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았다


이주용┃기관지위원장



10월 14일, 조국이 법무부장관 직을 내려놓음에 따라 조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격렬한 대립은 이제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사태가 쉽사리 가라앉긴 어려워 보인다. 두 달을 이어온 대치는 초기만 하더라도 제도정치권 내에서의 공방이 주축이었지만, 9월 말~10월 초에 이르면서 ‘조국 내전’이라 불릴 정도로 조국 찬성‧반대세력 양측 모두 거대한 대중집회로 결집했기 때문이다(스스로의 규정이든 상대방의 규정이든, 5만~1천만(!)에 달하는 사람이 각각 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였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양측은 서로에 대해 ‘숫자를 부풀렸다’거나 ‘조직적으로 동원했다’고 공격하며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여론’이라는 타이틀을 쟁탈하는 데 기를 썼다.


문재인 정부를 위시한 자유주의 세력과 자유한국당-우리공화당(친박 극우세력)이 대표하는 보수우파 세력이 각기 대등한 수준의 대규모 대중 동력을 실물로 운집시킨 형국은 2016~17년 촛불항쟁 이후 다시금 정치지형이 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조국과 그 일가에 대해 언론사를 막론하고 일일이 확인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매일 ‘단독’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양측으로 갈려 욕설과 고성의 잔치를 벌이는 데 피로감을 느끼고 신물을 내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렇듯 지난 수십 년을 이어온 ‘민주 vs 반민주’ 프레임은 형태를 바꿔가며 이번에도 다시 진영 구도를 형성했고 여전히 양 진영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이 대립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함을 확인했지만, 거꾸로 자신의 현실에 비춰 더 이상 이 구도에 뛰어들지 않고 오히려 염증을 느끼는 집단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집단과 기존의 정치 구도(자유주의자 vs 보수우파)를 떼어놓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조국 일가가 다시금 환기시킨 ‘계급’의 차이다. 문제는, 이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조직할 세력이 마땅치 않음에 따라 자칫 조국 사태로 더욱 만연한 정치 혐오가 그 사이를 휩쓸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위기


정부‧여당은 조국 사태를 계기로 상당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을 법하다. 한때 80%를 구가하던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조국 사태 이후 최근에는 41% 수준까지 추락했고, 국정 운영에 대한 부정 평가는 이미 긍정 평가를 앞질렀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율 역시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이제 자유한국당과 오차범위 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정도로 떨어졌다. 그렇기에 지난주부터 슬금슬금 ‘11월~12월경 검찰개혁 법안 국회 본회의 상정 뒤 조국 사퇴’라는 ‘출구전략’설이 흘러나왔고, 결국 조국은 법무부장관 취임 35일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다. 정부‧여당은 여론에 밀려 내쫓기듯 물러난 게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든 조국이 발표한 (검찰 측 방안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개혁안’에 의미를 부여하며 ‘성과를 거뒀다’고 윤색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저 궁색해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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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얼미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가 추락하고 정부‧여당이 위기감을 느끼는 이유는 조국 사태가 바로 문재인 정부를 구성하는 자유주의 세력이 명실상부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조국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10억 원이 넘는 돈을 ‘어디에 투자하는지도 모른 채’ 몽땅 펀드에 넣어 자산을 불리는 사람, 부모의 인맥을 통해 자녀에게 대학 인턴을 비롯한 입시 스펙을 쌓게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당장 내일의 생활을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정부‧여당과 지지자들은 ‘보수 정치인들도 다를 바 없다’고 물타기를 시도하면서(물론 이는 사실이긴 하지만) ‘민주 vs 반민주’ 구도를 회생시켜 ‘검찰개혁 vs 기득권’ 프레임을 조성하려 했지만, 주요 지지층을 강고하게 결집하는 데 성공했을 뿐 ‘결국 민주당이든 보수정당이든 다 똑같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자들’이라는 계급적 현실에 대한 자각과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 세력과 한배를 탄 ‘진보’


문제는 이 계급적 자각이 서초동과 광화문 사이에서 정치적 세력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국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이나 우리공화당 류의 보수우파에 도매금으로 묶이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은 바글바글했던 광장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이들을 독자적인 주체로 조직할 기획과 세력 모두 부재했기 때문이다.


주요 원내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의당과 민중당은 (민주당처럼 노골적으로 조국을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여당과 지지자들이 제기한 ‘검찰개혁 vs 기득권’이라는 구도에 동참하면서 독자적인 세력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다. 조국에게 ‘일정하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조국 일가 수사를 진행하는 ‘검찰이 더 문제’라며 민주당과 같은 전선에 선 것이다. 겉으로는 ‘검찰개혁’을 내세웠지만 실상 ‘문재인 정부 수호’ 여부가 본령이었던 이 양자대립에서, 두 원내 진보정당은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 vs 반민주’ 구도에 함께 올라탔다. 특히 정의당에 대한 호감도가 민주당과 비슷한 폭으로 하락하고,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심지어 당내 극한 대립으로 쪼개지기 직전인 바른미래당과 비교해도 지지율이 비슷하거나 뒤처지기도 하는 상황은 정부‧여당과 한배를 탄 정의당의 현재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정의당의 경우 현재 패스트트랙으로 올라간 선거법 개정을 통해 내년 총선에서 비례대표제를 확대함으로써 의석을 늘리려면 민주당의 표결 협조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조국 사태에 독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민중당 역시 노동개악 등 사안에 따라 정부‧여당에 비판적인 입장을 내기는 하지만, 이들이 핵심 과제로 보고 있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만큼 현 정부와 척을 지고 싶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정의당과 민중당의 행보는 비단 최근의 개별 사안(선거법이나 남북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근본적인 정치 전략에서 비롯됐다. 즉, 독자적인 계급 정치가 아니라 이른바 ‘민주 정부’에 동참하고(민주당이 자리만 내어준다면 연립정부를 목표로 하면서), ‘더 큰 악’인 보수우파에 맞서려면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는 이러한 정치 전략은 이번 조국 사태처럼 계급 문제가 진정한 쟁점으로 떠오를 때 지배계급 분파인 민주당에 발이 묶여 지배계급 내부의 쟁투에 스스로 갇힌 채 노동자계급 대중의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민주당과 자유한국당뿐만 아니라, ‘진보를 자임하는 세력 역시 주류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다’는 냉소를 야기함으로써 더 해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광장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미래의 위기


원내 진보정당과 달리 민주당과 한배를 타기를 거부한 좌파세력 역시 노동자계급 대중의 독자적 세력화를 추진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배계급 내부의 쟁투는 그 정도가 격해질수록 서로의 추악한 면모를 가감 없이 스스로 폭로한다는 점에서, 저들과 살아가는 현실 자체가 다른 노동자계급 대중에게 지배계급 분파 모두를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해야 함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했다. 특히 지지율 하락과 정치적 공세에 직면해 위기에 빠진 정부가 ‘민생’을 내세워 노동개악과 친재벌 규제완화로 국면을 돌파하려는 상황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비롯해 곳곳에서 투쟁이 터져 나오는 만큼 정부와 보수세력 모두와 선을 긋는 제3의 대항전선을 기획해야 했지만 이런 실천은 좀처럼 드러나지 못했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대립하는 광장을 보며 많은 이들이 ‘광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대해 논했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20대 청년층이 가장 많이 거론됐다. 이들은 서초동에도, 광화문에도 크게 호응하지 않았고(각 집회 참가자 가운데 20대 비중은 대단히 미미했다), 조국 자녀 입시와 관련된 대학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별도의 공간에서 별도의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별도 집회는 조국 퇴진을 요구하면서도 자유한국당 류의 보수세력에는 함께하고 싶지 않은 청년들이 모였다. 하지만 이 집회를 주도하는 분위기 중 하나는 이른바 ‘공정성 침해’에 대한 분노다. 이는 물론 생존경쟁에서 소수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체제가 야기한 결과물이지만, 그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세력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불공정하다’고 거세게 반발했던 흐름처럼 우파적으로 공명할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을 때 위기가 존재한다. 이 공백기간에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한다.”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맑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당대 파시즘을 분석하며 남긴 이 말을 다시 돌이켜봐야 한다. 조국 사태를 거치며 누구나 ‘정치의 위기’를 말하는 지금, 어느 때보다 계급 문제가 핵심으로 떠올랐으나 그 계급 주체 앞에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고 조직하기 위한 실천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를 향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가 축적되는 가운데 쳇바퀴 돌듯 반복하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세력 간의 정권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간지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검찰개혁’으로 모면하려는 정부



조국 사퇴 이후 정부‧여당은 (한편으로는 ‘민생’을 내세워 노동개악과 규제완화를 밀어붙이면서) ‘검찰개혁’을 전면에 걸고 위기에 봉착한 현 국면을 돌파하려는 모양새다. 정부‧여당과 지지자들은 조국 사태를 ‘검찰개혁 vs 개혁에 맞서는 보수세력-언론-검찰 등 기득권 세력’의 대립으로 몰았고, 서초동에 모인 조국 지지 집회를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의 증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는 아전인수에 가깝다.


정부‧여당이나 조국이 내세운 ‘검찰개혁’ 방안은 특수부 축소(검찰의 자체수사 축소)나 야간 조사‧공개 소환 제한 등 검찰 스스로 제시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뿐더러, 그나마 차이를 보이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는 그 내용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공수처 문제에 대해서는 <변혁정치> 83호 “공수처 설치가 답인가?: 권력기구 사이의 쟁투, 대중을 배제한 소모적인 논쟁” 참조) 이미 법안으로 상정된 것이라 국회 입법의 영역이지 검찰이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정부‧여당과 서초동 집회는 (물론 보수야당도 표적으로 삼기는 했으나) 명확하게 검찰을 겨누고 있었고, 더 정확하게는 ‘조국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가 불순하고 도를 넘었다’는 적개심의 발로였다.


당장 조국 사태 전까지만 해도 ‘검찰개혁의 선봉장’으로 추앙받던 검찰총장 윤석열은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 개시 직후 한편으로는 ‘역적’, 다른 한편으로는 뜻하지 않게 ‘보수 대스타’가 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한 검찰 수사를 칭송하던 정부‧여당 지지자들은 그 칼날이 현 정부를 향하자 곧바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검찰을 비난했다. 결국 이들이 내세운 ‘검찰개혁’의 진의는 ‘문재인 정부를 건들지 말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제 이들의 구도는 ‘검찰개혁 여부’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를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였을 따름이다.



‘검찰개혁’이라는 허구적 구호


물론 검찰에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검찰은 철저히 적대적 의미에서 계급적인 기구다. 조국 일가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삽시간에 검사와 수사관 수십 명이 투입돼 자택은 물론이고 자녀가 다녀간 학교 등 전방위에 걸쳐 압수수색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많은 노동자가 불법파견이나 노조파괴 범죄를 누차 고소‧고발해도 수개월에서 수년씩 묵히다가 불기소 처분하거나 대기업 총수 같은 ‘윗분’들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깃털에 불과한 실무자 몇을 기소하는 데 그치는 현실을 되뇌었을 것이다.


이는 정부‧여당이 내놓은 ‘검찰개혁’처럼 검찰의 권한을 ‘적당히’ 분산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령 경찰과 검찰의 수사권을 조정해 경찰이 1차 수사종결권을 갖는다고 해 보자. 대체 경찰이 검찰보다 더 낫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버닝썬’ 사건처럼, 경찰이 자본의 범죄에 눈 감고 수사를 묻어 버린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설 때 검찰이 법정에서 구형으로 노동자들을 옭아맨다면, 경찰은 일선에서 물리력으로 때려잡는다.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는 권력기구 사이의 권한 배분은 누가 더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억압적이다.


한편으로 검찰이 정치인들에게 ‘상대 진영을 압박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이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는 일은 지난 십수년간 목도한 일이기도 하다. 이는 그만큼 주류 정치권이 부정부패에 많이 연루돼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이제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을 아주 당당하게 내뱉는 지경이다), 이러한 검찰의 기능을 축소하는 데에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어느 정도 이해관계를 같이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계급 대중의 이해관계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오히려 때로는 지배자들의 범죄를 은폐함으로써 더 해악적일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권한의 과도함’ 자체가 아니다. 단적으로, 자본가들의 범죄를 낱낱이 밝혀 처벌하려면, 그에 필요한 막강한 권한이 필요하다. 그 권한을 누구의 통제를 받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진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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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상징의 성찬


애당초 조국 사태에서 양자 대립의 실체가 검찰개혁이 아닌 정권 수호 여부였던 만큼, 검찰개혁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딱히 쟁점화도 잘 되지 않는다. 여야 정치권은 국회로 넘어간 ‘검찰개혁’ 관련 입법을 두고 다시 치열한 공방을 벌이겠지만, 일반 대중의 이해관계와는 별 관련이 없기에 구체적 내용이 주목받기보다는 ‘검찰개혁 성과를 냈다’는 정부‧여당과 ‘문재인 정부 독재 시도를 저지했다’는 보수야당의 말과 상징의 성찬으로 적당히 마무리된 채 내년 총선에 돌입할 것이다.


만약 진정 검찰을 개혁하고자 했다면, 대중으로부터 선출되지도 통제받지도 않는 권력 행사를 문제 삼아야 했다. 물론 선출된다고 곧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의도에 들어앉은 300의 금뱃지 상당수는 언제나 노동개악 야합에 손을 들어준 자들이다.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을 위한 검찰개혁은 국가기구에서 일하는 공직자에 대한 대중적 선출‧통제와 더불어, 그들이 대변하고 수호하는 질서 자체에 대한 변혁을 요구한다. 문재인 정부든 보수야당이든, 그들이 말하는 ‘검찰개혁’이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허구적 구호에 불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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