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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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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1.16 19:43

‘공기업’ 한국마사회가 만든 
죽음의 레이스

남영란┃부산


2019년 11월 29일, 고 문중원 기수는 한국마사회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7명의 마필관리사와 기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비극은 모두 “부산경남 경마공원”에서 일어났고, 이들이 남긴 유서에는 하나같이 마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담겨 있었다. 한국마사회는 연간 8조 원에 달하는 매출액과 2천억 원 이상의 당기순이익을 내는 공기업이다. 110억 원 넘는 국고보조금을 받는 공기업 한국마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줄지어 죽음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사회가 내세운 이른바 ‘선진 경마’ 앞에서 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이런 것이었다: 생계의 불안정, 부당한 지시, 노동안전의 위협, 고용관계 외부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관리감독의 부재….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이유는 차고 넘쳤다.


7명의 죽음, 부산경남 경마공원

한국마사회가 1993년 ‘개인 마주제’로 전환하기 전까지, 조교사와 마필관리사, 기수는 모두 마사회가 직접고용하고 있었다. ‘비리를 근절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라며 시행된 개인 마주제는 기존의 고용관계를 외부화해서 조교사와 마필관리사, 기수들을 외주화했다. 특히 기수들은 ‘독립 계약 소득자’라는 이름의 특수고용 노동자로 분류돼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2004년 개장한 부산경남 경마공원은 처음부터 ‘선진 경마’를 내세워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체제를 도입했다. 마필관리사와 기수들은 조교사 개인들과 고용 및 기승(경주에서 말을 타는 것) 계약을 맺었고, 임금은 순전히 순위 상금(특히 경쟁성 상금을 확대)으로만 주어졌다. 순위에서 밀려나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기승 여부가 기수에게는 곧 생존의 문제로 직결하기에 이 권한을 쥐고 있는 조교사의 권한은 막강하며, 조교사의 부당한 지시와 불이익, 인권침해를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마필관리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7명의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죽음에 관해 조교사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2017년 고 박경근 마필관리사가 남긴 “*같은 마사회”라는 유서, 고 문중원 기수의 유서, 그리고 삶을 등진 기수와 마필관리사들의 유서는 모두 한국마사회를 겨누고 있다. 조교사는 마사회와 용역계약을 맺고 마방(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곳)을 임대받아 운영한다. 마방을 임대받지 못하면 활동할 수 없다. 기수와 마필관리사에게 ‘갑’의 위치에 있는 조교사 또한 마사회에 종속되어 있다. 한국마사회가 모든 실질적 권한을 쥐고 있으며 사용자로서 책임이 있지만, 고용관계 외부화를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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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문중원 열사 시민대책위 텔레그램 채널]



한국마사회가, 청와대가 해결하라

2019년 12월 27일, 고 문중원 기수 유가족은 고인의 시신을 안고 청와대로 향했다. 부산경남 경마공원은 개장할 때부터 ‘선진 경마’라는 미명 하에 마필관리사들과 기수들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하고 생계의 위협을 감내하며,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말을 관리하고 기승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7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한국마사회 회장은 부산경남 경마공원의 문제로 축소하고, 한국마사회 부산경남지역본부가 해결할 문제로 처리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마사회다. 면허권과 징계, 마사대부(조교사 자격을 가진 사람 중 마사회에서 마방을 임대한 사람)를 통해 기수와 마필관리사는 물론 조교사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도 마사회다. ‘선진 경마’를 앞세워 부산경남 경마공원을 죽음을 부르는 무한경쟁 체제로 만든 것도 마사회다.

마사회는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공기업으로서, ‘말산업으로 국가경제 발전과 국민 여가선용에 기여한다’는 미션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저 다단계 착취업체일 뿐이다. 조교사라는 중간 매개를 통해 원청의 사용자성을 회피하고,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며, 노동조합을 무력화시켜 기댈 곳조차 사라지게 하는 ‘공기업’.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옆의 동료를 이겨야만 하고,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파열되면서도 목숨을 담보로 말을 관리하고 말에 올라야 하는 ‘공기업’. 산재 신청은커녕 산재를 은폐하기 급급한 ‘공기업’. 이 모든 게 ‘선진 경마’를 내세운 한국마사회의 실상이다. 엄연한 공기업에서 벌어지는 이 비극적 현실에 대해 마땅히 문재인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지금 당장 ‘선진 경마’부터 폐지시켜야 한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기수들은 한국마사회의 구조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할까 두려워하면서도, 차마 나서지 못한 채 피눈물을 흘리며 오늘도 경주를 뛰고 있다. 이 비극을 멈출 수 있는 힘은 7명의 동료를 떠나보낸 기수들과 마필관리사들에게 있다. 고 문중원 동지의 비보에 전국의 기수들이 부산경남 경마공원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부산경남 경마기수 노동조합의 설립으로 한 발을 내딛으려 한다. 노동자로서 떨쳐 일어난 기수들과 마필관리사들, 죽음으로 항거한 7명의 노동자, 그리고 이들을 가슴에 품고 투쟁하고 있는 유가족과 연대하자. 이제는 죽음의 레이스를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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