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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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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5.15 17:58

루디 고구엘 1908~1976


세계대전을 끝냈던 독일 노동계급,

파시즘이 몰아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나?


이한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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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을 끝낸 것은 1918년 11월 혁명을 일으킨 독일 수병과 노동자들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음을 맞는 등 비극으로 이어지긴 했지만(<변혁정치> 96호 기사 “로자 룩셈부르크: 독일 혁명의 붉은 독수리” 참조), 전쟁을 멈춘 노동계급의 힘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에 비해 불과 20여 년 뒤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노동계급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희미하게 느껴진다. 사회주의 세력은 유대인과 함께 핍박당했다는 수동적 인상만 깊이 남겼다. 한때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독일 노동자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1월 혁명의 교훈을 되새긴 히틀러,

고립되는 노동운동


유감스럽게도 히틀러야말로 11월 혁명의 교훈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11월 혁명을 ‘영광스런 승리를 눈앞에 두고 등에 칼을 맞은’ 사건으로 기억하며 와신상담했다. 독일 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위해 내부의 적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여기서 비롯했다. 이에 따라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당(나치)은 반공산주의, 반유대주의, 반국제금융 노선을 천명했다. 실업자와 중산층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자본가계급을 향한 구애도 빼놓지 않았다.


나치의 현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나치의 극우적 성격이 드러나는 1930년을 전후로 공산당은 오히려 세력을 확장했으며 공산당에서 나치로의 이동은 극히 미미했다. 사민당과 공산당의 선거 득표수는 종전 규모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는 주로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직노동자에 한정됐다. 문제는 그 바깥이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던 임금노동자들이 상당수 나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행동주의에 매료된 실업자들로 구성된 돌격대 덕에 나치가 한때 사회주의 혁명정당으로 인식될 지경이었다. 나치는 특유의 평등주의와 신선한 선동으로 호소력을 발휘했다. 나치가 앞세운 ‘민족의 이익’보다 계급적 관점을 견지한 건 기존에 교육으로 무장한 조직노동자들뿐이었다.



사회주의 세력이 삽시간에 쓸려나가다


고립된 노동운동은 대공황의 결정타를 맞았다. 노조는 대량실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살아남은 사업장에서도 해고, 임금 하락, 노동시간 단축을 감수했다. 지도부가 총파업으로 대응하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은 제조업을 제외한 공공, 운수 분야 노동자들이 이미 나치의 주요 지지층으로 넘어간 탓에 파업 참가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독일 최대 정당인 사민당은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입장과 노동계급 정치세력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우물쭈물했다. 결국 사민당은 혁명 이후 쌓아올린 사회개혁 성과마저 하나둘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역사가 티모시 메이슨이 지적했듯 노동계급은 점증하는 궁핍과 불안 속에 더 이상 조직적 존재로 남지 못하고 개별화, 파편화했다.


1933년 나치는 제국의회 방화사건 배후로 공산당을 지목하며 본격적으로 테러를 감행했다. 그 해에 2천여 명의 공산당원이 살해당했고 6천여 명이 수감됐다. 뒤이어 노조와 사민당 모두 불법화됐고, 노조의 자리는 나치가 설립한 조직 “노동전선”이 대체했다.


공산당원 야곱 초른은 “1933년에 닥쳐온 타격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조직화된 독일 노동계급이, 그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힘없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공산당원 루디 고구엘은 당원들이 “인민 다수가 실제로 히틀러에 반대하고 있었다고 확신”하며 “히틀러 정당이 매일매일 노동자 대중 속 깊이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리는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초른과 고구엘 또한 뵈르거모어 수용소에 수감됐다.



파시즘을 끈질기게 거부한 노동자들


나치의 테러는 강력했지만 여기서 끝난 건 아니다. 노동자들은 생활까지 파고든 통제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역사가 포이케르트가 분류했듯 노동자들은 첫째로 계급적 전통, 의식, 결속을 지켜갔다. 둘째로 파시즘 이후 민주주의를 논의했으며, 셋째로 파업과 태업 등으로 나치에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저항은 대규모 탄압을 겪었다. 고구엘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이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 대부분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디서든 자기가 할 일을 하려 했다. 고구엘은 “모어병사의 노래(Die Moorsoldaten)”를 작곡하기도 했으며, 이 노래는 스페인 내전을 비롯해 유럽 각지에서 울려 퍼진 유명한 저항가가 됐다. 이들이 이어간 명맥은 1945년 반파쇼위원회와 정당, 노동조합 창설의 기반이 된다.



덧붙여


운동의 명맥을 이은 활동가들은 전후 서독과 동독에서 각각 활동을 이어갔다. 앞에 등장한 고구엘은 두 곳에서 모두 여생을 보냈다. 서독에서 지역 일간지 편집자로 활동했으나 서독 정부의 공산당 탄압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돼 동독으로 송환, 독일현대사학회와 훔볼트대학에 몸담았다. 그는 그곳에서도 통일사회당* 내 견해 차이로 은퇴할 때까지 국가보안부와 긴장관계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참고문헌]

- 티모시 메이슨,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 사민당과 공산당이 합당해 결성한 동독의 수권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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