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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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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5.16 17:48

좀남색잎벌레



날씨가 더워지니 갑자기 벌레들이 많아졌다. 날벌레보다 꼬물꼬물 기는 애벌레들이 많이 보인다. 동네 숲길을 걸어 돌아 나오니 몸에 애벌레가 몇 마리 붙어 있다. 숲길엔 실에 매달린 애벌레가 주렁주렁했는데 몇 마리를 미처 피하지 못했던 게다. 애벌레가 넘쳐나는 이때가 새들이 새끼를 키우는 때다. 부지런히 벌레를 물어다 먹여 어린 새를 키운다. 고단백 애벌레를 먹고 어린 새는 쑥쑥 자란다. 숲에서 새들과 애벌레는 목숨을 건 숨바꼭질을 벌인다. 애벌레는 잎을 말고 그 속에 숨거나 나뭇가지 흉내를 내고 마른 잎 조각 따위를 몸에 붙이기도 한다. 다들 꽁꽁 숨기 바쁜데 나를 잡아먹으라는 듯 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 애벌레들은 왜 이러는 걸까? 오히려 천적을 피해 나뭇잎에서 뛰어내린 걸지도 모르겠다.


숲길을 나와 물길을 따라 걷는다. 물가에 자란 커다란 소리쟁이 잎에 구멍이 송송 뚫려 그물처럼 되었다. 거기에 새까만 애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소리쟁이만 먹는 좀남색잎벌레 애벌레다. 좀남색잎벌레 애벌레는 알을 까고 나올 때부터 함께 모여 같이 잎을 먹고 잎을 다 먹으면 다른 잎으로 같이 옮겨 다닌다. 이렇게 떼로 모여 살면 천적들 눈에 더 잘 뜨일 텐데,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이 위협적으로 보여 천적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하는 걸까.


이 애벌레들 어미는 아직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땅속에서 나온다. 소리쟁이 근처 땅속에서 어른벌레로 겨울을 난 좀남색잎벌레는 쑥쑥 자라기 시작하는 소리쟁이를 찾아와서 그 잎을 먹고 주린 배를 채운다. 암컷 좀남색잎벌레는 알을 낳으려고 더 게걸스럽게 소리쟁이 잎을 뜯어 먹는다. 배는 알이 될 난황 물질 때문에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반짝이는 남색 딱정 날개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노란 배를 보면 한눈에 좀남색잎벌레 암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암컷은 소리쟁이 잎에서 냄새를 풍겨 수컷을 부르고, 소리쟁이 잎에서 짝짓기를 하고, 소리쟁이 잎에 40~50개 알을 낳아 붙여 놓고, 소리쟁이 잎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좀남색잎벌레 사체는 썩어서 소리쟁이 거름이 되려나.


알을 까고 나온 좀남색잎벌레 애벌레들은 먹이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어미가 알을 붙여 놓았던 소리쟁이 잎을 먹으면 된다. 20일쯤 지나 소리쟁이 잎을 다 뜯어 먹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기고 좀남색잎벌레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려고 소리쟁이 근처 땅속으로 들어간다. 줄기만 남은 소리쟁이는 땅속 깊이 내린 뿌리에서 다시 새잎을 낸다. 좀남색잎벌레 애벌레는 땅속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다시 어른벌레가 되어 땅 위로 올라온다. 소리쟁이 잎을 먹으며 지내다 여름 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서 이듬해 봄까지 아주 긴 휴면에 들어간다.


물가엔 소리쟁이가 여전히 지천인데 좀남색잎벌레는 알을 낳아 번식하지 않고 왜 긴 휴면을 택한 걸까? 소리쟁이는 가축들이 먹지 않는 풀이다. 소리쟁이 잎에는 풀을 먹는 짐승들의 식욕을 떨어뜨리는 탄닌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지 않지만, 소리쟁이를 먹는 곤충은 많다. 좀남색잎벌레 외에도 소리쟁이진딧물을 비롯해서 딸기잎벌레, 상아잎벌레, 큰주홍부전나비, 검정날개잎벌 따위가 그런 곤충이다. 좀남색잎벌레는 이른 봄 가장 먼저 소리쟁이를 찾아온다. 좀남색잎벌레만큼이나 소리쟁이를 좋아하는 소리쟁이진딧물이 소리쟁이 잎에 꼬일 때쯤이면 좀남색잎벌레 애벌레는 땅속에서 번데기가 되어간다. 서로 활동 시기를 달리 해서 심각한 먹이 경쟁을 피하는 것이다.(「곤충의 밥상」 / 정부희 / 상상의숲) 좀남색잎벌레는 먹이 경쟁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곤충보다 서둘러 소리쟁이를 찾았고, 다른 곤충들이 소리쟁이를 찾을 즈음 일찍부터 휴면에 들어갔던 게다.


물가를 둘러보니 허리까지 자란 소리쟁이가 많다. 아무리 좀남색잎벌레가 극성을 떨어도 소리쟁이는 물가에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잘 살아간다. 저 꼬물거리는 애벌레는 식물을 먹고 새와 같은 천적들은 애벌레를 먹고 자란다. 벌레와 새의 똥이나 사체는 또 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분이 되어 준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생태적으로 이어져 있을 게다. 소리쟁이와 좀남색잎벌레는 생태계 전체에서 보면 단순히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공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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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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