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우리가 죽어 나갈 때

‘히어로’는 어디에 있었는가


김성민┃충북(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 사무국장)



나는 TV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챙겨보는 게 어렵기도 하고, 중간중간 빼먹고 보게 되면 내용이 잘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동지로부터 ‘근로감독관의 활약을 다룬 드라마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동지는 “<반지의 제왕> 이후 최고의 판타지 드라마가 아닐까 한다”며 웃었다.


드라마를 제작한 노동자들, 그리고 연기한 배우들을 폄하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그동안 노동부에 줄기차게 항의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으로서,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거나 별로 생길 수 없는 일이 TV에 나오니, 아쉬움에서 묻어나온 푸념이다.


찾아보니 <스포츠동아>에서는 이렇게 제목을 걸었다.

“조장풍 김동욱, 선심+진심+뚝심 → 현실판 진짜 히어로”


드라마 속에서 노동부 근로감독관의 멋짐이 뿜어 나오는 장면은 그동안 막힌 속을 뻥 뚫어준다. 철저히 갑과 을로 구분된 사회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사이다 같은 후련함을 안겨주기 때문인지, 시청률 또한 높은 편이었다. 나는 유튜브를 통해서 잠깐잠깐 내용을 보았다. 그런데, TV 속 후련함은 현실에선 어떨까?



노조파괴에 면죄부를 준 ‘현실의 노동부’


유성기업 노조파괴는 국가기관의 도움 없이는 진행되기 어려웠다. 특히 가장 책임을 져야 할 기관은 노동부다. 노동부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가장 먼저 밝혀내고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부는 유성기업이 장장 8년에 걸쳐 노조파괴를 자행하는 동안 대단히 사측 편향적이었고, 사건 조사나 처벌은 매우 미흡했다. 우리는 사측이 민주노조를 깨기 위해 강행했던 직장폐쇄가 불법이라고 외쳤지만, 노동부는 ‘법의 판결을 보자’고 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시점에서 대법원 판결이 나왔고, 그제서야 노동자들은 직장폐쇄 기간의 임금을 지급받았다. 하지만 사측은 노조파괴의 칼부림을 벌였고, 수백 명이 부당징계, 수십 명이 해고당했다. 공장 안에서 사용자의 칼날에 노동자들을 보호할 노동부의 방패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으로 노조파괴 전문 업체인 “창조컨설팅” 문건이 나오면서, 검찰과 노동부는 2012년 회사를 압수수색했다. 처음에 노동부 근로감독관은 2차례 ‘구속기소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끝내 이는 반영되지 못했다. 결국 3차 의견서는 ‘불구속 기소’로 올라갔고, 기소내용도 최소화됐다. 우리는 분노해서 노동부 천안지청을 찾아가 근로감독관에게 항의했다. 당시 천안지청장은 ‘대표자들만 나와서 면담을 하자’고 제안했고, 면담에서 우리 노동조합 측 대표자는 “검찰의 압력이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지청장이 대답을 하지 않자 대표자는 화를 내며 재차 물었고, 이에 지청장은 “제가 대답을 안 하면 긍정으로 받아주세요”라고 말했다. 노동부가 사실상 검찰의 지휘하에 있으니, 불기소 의견으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86_37.jpg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나


사측은 용역 깡패, 직장폐쇄를 동원하며 노조를 무력화하려 했지만, 동시에 현장의 일상에서도 노조파괴를 자행했다. 민주노조 소속 조합원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면서,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탈퇴하고 어용으로 가도록 밀어 넣는 것이다. 무려 6년 동안이나 임금을 인상해주지 않는 차별, 성과급·진급·잔업과 특근에 대한 차별이 노동자들을 짓눌렀다. 우리는 수십 차례 노동부를 찾아가고 항의했지만, 부당노동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돌아왔다. 사측에 대한 노동조합의 고소·고발은 수도 없이 ‘증거불충분’이나 ‘기소유예’ 처분으로 끝났고, 설령 기소가 이뤄져도 회사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측이 현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던 2014년에는 증거를 잡은 노동자들이 24시간 동안 현장(메인 하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을 지켜가며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을 불렀다. 그들은 억지로 공장에 내려왔다. 그리고 끝내 검찰은 불기소 처리했다.



자본주의에서 ‘히어로’라니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에게 몇 번 전화를 한 적이 있는데,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젊은 근로감독관들은 회사를 무서워한다. 항의하는 노조도 무섭고. 그래서 나이 있고 경력이 있는 우리가 내려간다”고.


현실에서 회사의 폭력과 불법을 처벌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을 보다가,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을 보면서 현실을 도피하는 게 참으로 씁쓸하다. 회사를 두려워하는 근로감독관들이 과연 부당노동행위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을까?


출범 초기 ‘부당노동행위를 근절하겠다’던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말을 뒤집어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처벌을 최소화하겠다고 개악 입법을 들이미는 지금, 노동부에 “조장풍”이 있을 턱이 없다.


단 한 사람의 용기와 신념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진짜 ‘히어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상은 절대로 그런 히어로를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불법을 저질러도 자본을 비호하는 권력과 제도가 켜켜이 쌓인 세상이다. 우리 곁에 “조장풍” 같은 근로감독관은 없었지만, 함께 싸우고 시간을 이겨냈던 동료들은 있었다. 오로지 다수의 민중에 의해서 세상은 바뀐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을 보고 현실의 근로감독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그들의 생각이 더 궁금하다.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