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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건강대로 해치고, 

돈은 대로 갖다 바친다


안종호┃강원(내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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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개인 유전자 분석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지난 2월 11일, 산업부는 “규제 샌드박스” 1호 안건으로 유전체 분석 민간기업 “마크로젠”이 신청한 “소비자 직접 의뢰 유전자 분석 서비스(DTC: Direct To Consumer)”에 실증 특례를 부여했다. 표현이 어렵지만, 민간업체가 의료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개인에게 직접 주문을 받아 유전자 분석 결과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기존에도 체질량·콜레스테롤 등 12개의 제한적 항목에 대해서는 이게 가능했다. 그런데 이번 규제 완화로 뇌졸중과 주요 암 질환, 노인성 질환에 대해서도 DTC 유전자 검사를 허용하게 됐다. 영리 목적의 민간기업이 개인 유전자를 분석해 ‘앞으로 암 같은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고, ‘발병 확률이 높은 질환에 미리 대비하는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2월 14일에는 보건복지부도 나섰다. 앞서 언급했듯 12개 항목으로 제한했던 DTC 유전자 검사 허용 범위를 넓혀, “웰니스*” 위주의 57개 항목에 대한 DTC 시범사업을 열어준 것이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은 오히려 DTC 유전자 검사에 대한 규제와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의 규제 완화는 국제적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며,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내 유전자를 간편하게 분석해 질병 위험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 의료자본은 시민들의 자기 건강에 대한 걱정을 십분 활용한다. ‘나만의 유전자로 나만의 건강한 미래를 준비한다’고 선전하거나, ‘맞춤형 건강서비스’라는 화려한 포장지도 난무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은 건강대로 해치면서, 돈은 돈대로 갖다 바치는 비극이 막을 올리는 것이다.



유전자 검사의 유효성, 입증된 바 없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전 변이와 각종 질환의 연관성을 연구한 결과는 여전히 매우 미약하다. 즉, ‘유전 변이를 통한 질병 예측’은 현재 유효성이 대단히 낮은 수준이다. 모든 복합 유전 질환이나 신체 특성에 대해, 지금까지 드러난 유전 변이를 모두 합해도 10% 이상 설명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 유전자는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여러 층위에서 유전자 간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질병 발생에는 유전 요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환경 요인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유전 요인이 질병 발생에 미치는 역할은 그리 크지 않다. 곧, ‘유전 변이를 분석해 질병을 예측한다’고 주장하는 유전자 검사의 유효성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가령, 현재 허용된 DTC 유전자 검사 대부분은 수백 개의 유전자가 관여하는 것으로, 몇 개의 유전 변이 검사로는 단 1%밖에 설명할 수 없다. 비만․혈압 등에 대해서는 유전 변이가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고, 식습관이나 환경 등 다른 여러 요인의 영향이 더 크다.


더욱이 업체마다 평가 기준이 제각각이라, 같은 유전 정보에서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온다. DTC 유전자 검사 결과를 의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국내 유전자 검사 업체들이 난립하는 데 반해 관리와 감독은 너무 허술해, 신뢰성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유전자 검사의 유효성은 확실히 입증된 바 없기 때문에, 엄격한 의학적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DTC 유전자 검사는 영리 목적의 민간업체가 의료기관도 통하지 않고 수행한다. 때문에 이윤 창출을 위한 오남용 소지가 높고, 유전자 검사에 대한 근거 없는 비과학적 신뢰를 부추긴다. 이는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다. 애초에 유전자 검사 자체의 근거가 제한적이니 질병의 원인과 예측을 왜곡할 수 있고, 부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앞으로 어떤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식의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 결과는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유해한 의료행위 남발이다. 시민들은 건강을 도리어 해치게 되지만, 의료자본은 없는 병까지 만들어내 돈을 벌 수 있다. 앞의 기사에서 거론한 ‘안젤리나 졸리 효과’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의료 영리화로 직행하는 길


문재인 정부의 유전자 검사 규제 완화는 보건의료 상업화를 노리고 있다. 유전자 검사를 의료행위가 아닌 영리적 민간 서비스로 허용하고, 여기에다 ‘미래의 질병’에 대한 공포 마케팅을 곁들여 ‘건강관리 서비스’까지 연계하는 것이다. 이게 의료 영리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DTC 유전자 검사 오남용은 민간업체에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고, 그 필연적 결과인 불필요한 건강서비스는 헬스․바이오 기업의 이윤추구 먹잇감이 된다. 나아가 개인의 건강․유전정보의 부실한 관리와 상업적 이용, 빅데이터 구축은 원격의료와 ‘헬스․바이오산업 육성’이라는 이름의 더 큰 의료 영리화로 이어진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보건의료 부문 규제 완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보건의료 빅데이터, 신약개발과 임상시험, 의료기기 규제 완화, 원격의료와 영리병원 허용 등 박근혜 정부 의료민영화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창조경제’가 ‘4차 산업혁명’과 ‘혁신성장’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것뿐이다.



* 웰니스(wellness): ‘신체적 건강(헬스)’을 기반으로 ‘정신적․사회적 건강과 활력’까지 포괄하는 용어. 최근에는 보건의료 부문에 대한 상업화 용도로 많이 쓰이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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