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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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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질 것이 터졌다

정권과 정보기관, 새로운 관계정립의 현주소


이한서┃서울



국가정보원이 내부공작원을 심어 대공수사를 진행해왔다는 소위 프락치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내부공작원 A씨는 자신에게 접선해온 국정원 경기지부 공안 2팀이 자신들을 ‘RO 사건 기획자’라고 소개하며 비슷한 맥락의 공작을 지시, 주문했다고 폭로했다. 특정 단체에 깊숙이 침투시켜 발언 유도와 녹음 등 공안사건 조작을 위한 밑작업을 5년여 동안 진행해왔다. 국정원은 공식적인 대공수사가 아니라 내사 행위였다고 주장했지만, 국정원감시네트워크 소속 단체들이 지적했듯 5년에 걸친 무제한적 내사는 수사권 행사의 가면에 불과했다.


문재인 정권은 출범 초부터 정보기관들을 주요 개혁 대상으로 지목했으며 이는 이 정부가 맡은 숙명과도 같이 여겨졌다. 애초에 민주당이 2012년 대선, 2011년 재보선을 비롯해 수십 년 동안 국정원이 개입한 수많은 선거공작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 초기, 시국선언과 촛불로 번진 국정원 대선개입 진상규명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것도 국정원이 터뜨린 RO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이 사건을 통합진보당 해산, 테러방지법 제정으로 이어가며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이외에도 중요한 정국마다 국정원과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국정원은 2011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을 조작하거나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중국 북한식당 종업원들을 납치해 탈북으로 조작하는 등 민감한 이슈를 만들어냈다. 기무사는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하고 촛불 정국에서 계엄령 선포 방안을 입안했다. 정보기관은 정권에 의해 수동적으로 동원된 선의의 가해자가 아니라, 자체적인 목적 하에 정국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연출자였다.



문재인 정권과 정보기관의 밀월


빗발치는 정보기관 개혁 요구에 문재인 정권은 2017년 국정원의 국내 기관과 단체들을 대상으로 한 정보수집 조직을 폐지하고 기무사를 군사안보지원사령부(안보지원사)로 개편했다. 경찰개혁위원회는 정보국 재편을 권고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정보기관의 간판과 조직은 바꿨지만, 그 이상의 변화가 없었다.


뿌리 깊은 쟁점이었던 국정원의 대공수사권과 정보수집권은 축소되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국정원 개혁법안을 국회에 상정했지만 3년 뒤에 처리하자는 여야 논의 이후 방치됐다. 국정원이 이번 프락치 사건을 두고 내사 운운하며 변명할 수 있는 것도 그들에게 실제로 수사 기획 권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백 번 양보해 개혁 지체가 국회 때문이라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바는 해왔을까? 청와대는 국정원장에게 광범위한 신원조사권한을 부여한 대통령령(보안업무규정)을 국가인권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한 자도 바꾸지 않았다. 안보지원사는 설치근거가 된 대통령령(안보지원사령)을 통해 기무사 시절의 대공수사권, 무제한 군 통신감청권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심지어 정권 교체 후 진행된 정치개입 의혹사건 진상조사 결과나 정치개입 금지 내부규정마저 내부자료라며 공개하지 않아, 성과라 할 만한 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정보경찰에 대해서는 오히려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해 5월 경찰 수사권 조정 문제를 다룬 당‧정‧청 협의회는 정보경찰에 관해 폐지도, 개혁도 아닌 존치를 결정했다. 정보경찰은 대통령령(경찰청과 그 소속기관 직제)에 따라 정치, 경제, 노동, 사회, 학원 등 제 분야에 관한 치안정보 수집, 정책정보 분석 및 입안, 인사검증 및 신원조회 등 사실상 국내 모든 분야의 정보에 접근하고 내용을 입안해 청와대에 보고할 수 있다. 청와대의 수사권 조정안을 정보경찰이 입안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권과의 밀월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는 추측이 무성하다.



계급독재의 산물


문재인 정권이 간판과 인물을 바꿔가며 정보기관과 다시 관계를 정립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청산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존치와 활용의 대상으로 만난 게 문제다. 국정원, 안보지원사, 정보경찰이라는 삼각구조에서 무게중심은 옮겨 다니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권한과 업무는 전 정권 시절에 비해 변한 바가 없다. 그들이 새로운 정권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치활동을 단념하리라 기대했다면 그게 더 순진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이번 프락치 사건은 터질 게 결국 터진 격이다.


이번 사건은 정보기관 개혁이 정부에 의존할 수 없는 투쟁 과제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앞으로도, 어떤 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국가의 계급적 특수이익과 재생산을 지키기 위해 폭력적, 회유적 수단을 총동원하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정보기관은 ‘합법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할 권력을 가진다. 대중의 의식에 개입할 효과적인 사건을 기획할 수도 있다. 국가의 정보기관은 계급독재 사회에서 권력의 내부쟁투와 계급투쟁에서 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무기다.


이는 거꾸로 말해 사회적 연대와 대중적 운동을 통해서만 정보기관에 대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국정원, 안보지원사, 정보경찰을 폐지하고 이들의 공작 내역을 샅샅이 조사, 처벌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정권이 정보기관이 뛰어놀던 무대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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