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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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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한수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어떤 이름들이 대개 그러하듯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이라는 이름 속에 우리는 우리의 활동 방향을 품고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 다른 건 필요 없었다. 복잡한 기획물이 됐든, 만화가 됐든, 인물 다큐가 됐든, 그 무엇이든, 영상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좀 더 신속하게,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노동자 대중을 만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분명 우리의 초기 활동들은 그런 방향에 어울릴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여전히 연속성을 갖고 노동자 대중을 만났지만 다양한 영상 활동이나 신속함의 미덕은 잃어버렸다. 갈수록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활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그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것, 비록 개개인들의 기호와 욕망에서 출발하지 않았지만 가치를 찾고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것, 말하자면, 눈부시던 시간은 사라지고 소소한 그런 것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다. 그런 우리의 일상을 살짝 뒤흔들면서, 초기의 우리 활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작업이 있었다. 물론 한 단위 사업장 안에서이고, 외부로부터 주어진 일이었다. 그 일은 우리가 활동을 시작한 지 16년째인 2005년 초에 우리에게 왔다. <열열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단협으로 쟁취한 노동자방송

민주노조가 있는 사업장 가운데 다른 사업장에는 없는데 현대차와 기아차에는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노동자방송이다. 이들 사업장은 조합원들이 TV로 노동조합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일주일에 1시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노조 방송을 내보내는 것을 현대자동차 노조는 단협으로 쟁취했다. 노조는 우리 조합원들에게 보여주는 영상은 우리 손으로 만들 거야!”라는 큰 목표를 세웠다. 노조 내에 방송 제작을 위한 영상실이 마련되고, 현장의 노동자영상패는 영상위원으로 재편해서 노조 집행간부로 한 명씩 영상실에 올라오고, 그것만으로 안 되니 외부 제작 실무 간사도 한 명 더 채용했다. 그리고 더 이상 외부작업은 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하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노동자방송을 몇 년 운영해보니, 매번 이번 주는 노조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에서 시작해 어떤 일을 하겠다로 끝나는 방송에 조합원들도 현장 활동가들도, 심지어 노조 집행부도 불만이었다. 불만들이 폭발하기 직전에 결국 현자 노조는 외부와의 협업을 재개했다.

 

다양한 영상으로 노동자 대중을 만나다

<열열(10*10)프로젝트>20053월부터 12월까지 10회를 현대자동차노조 방송에 10분 동안 방송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도합 10편의 방송물 작업이었다. 현장성과 조합원과의 소통, 거기에 재미를 덧입히는 것이 제작 목표였다. 이 작업은 초기 우리의 활동을 단위사업장으로 그대로 옮겨온 듯했다. 일 년간 연속적으로 노동자 대중을 만나고, 시간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범위가 좁아진 대신 노동자 대중을 보다 깊게 만날 수 있었고, 초기에 이런저런 한계로 인해 못했던 다양한 방송 포맷들을 다 해볼 수 있었다. 10분짜리 방송물 안에는 크게 두 가지 코너가 있었다. 매달 다른 내용과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열열상영관이라는 7분짜리 실사영상으로 만든 코너가 있고, 3분에서 5분짜리 열열애니메이션이라는 애니메이션 코너가 있었다. 이렇게 총 20개의 단편들을 만들었는데, 내용들은 모두 그 시기에 일어난 것, 그 시기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담아낸 그릇은 다양했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엿볼 수 있는 각종 통계들을 살펴보는 통계쇼, 임금의 비밀을 풀어보는 퀴즈쇼, 조합원들의 여러 속내를 들여다보는 고백쇼, ‘단협에 관한 5가지 정의를 통해 단협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쉬운 교육물들까지, 드라마 빼고 실사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식의 다큐를 시도했다. 드라마는 애니메이션에서 간단하게 시도했다. 산재로 오빠를 잃은 여동생의 편지, 서로의 처지가 달라진 채 현장에서 재회한 옛 동료에 대한 씁쓸한 이야기 등을 드라마로 재구성했다. 메이데이 유래를 다룬 5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이 방송 이후에도 오랫동안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메이데이를 앞두고 즐겨보는 영상이 되었다.

평가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뉴스만, 그것도 노조에서 한 일을 다룬 뉴스만 보다가 기획물, 그것도 뭔가 해야 된다고 숙제를 내주는 기획물이 아니라 짧고 부담 없고 지금의 내 이야기 같은 기획물들과,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들을 다룬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매주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니 어찌 안 좋겠나.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기획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현자노조의 노동자방송이 그 타개책으로 우리와 협업을 시도했고, 그 즈음 우리역시 현자노조 방송과 마찬가지로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둘은 서로의 문제를, 서로를 의지 삼아 해결한 셈이 됐다. 신의 한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 <열열프로젝트> 2005312/110/현대자동차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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