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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전국노동자대회와 전노대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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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6월 1일,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출범식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93년 전국노동자대회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주최로 1031일에 열렸다. 전국노동자대회는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의 의미로 매년 1113일을 전후해 열렸는데 이 해는 달랐다. 대회 직후 전국 단위노조대표자 농성투쟁을 배치하는 등 노동법 개정 투쟁을 공세적으로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말 많고 탈 많았던 1993년 전국노동자대회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공방은 1991년부터 계속됐다. 김영삼 정권은 한국노총, 경총, 학계 등으로 노동법 개정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모양새를 갖추며 법 개정 시기를 저울질했다. 19933ILO가 민주노조 운동진영이 핵심적으로 개정 요구하고 있는 복수노조금지 조항 삭제,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보장, 3자 개입금지 조항 삭제 등을 한국 정부에 권고하면서 상황이 노동운동진영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은 19938월말 법 개정을 미루겠다고 했지만, 민주노조 운동진영은 법 개정 요구를 투쟁으로 모아가기로 했다. 전노협을 중심으로 전 지역에서 간부 조합원 교육이 이뤄졌고 경주, 포항, 천안, 대전, 목포 등 미가입 지역에서도 교육 및 강연이 열렸다. 전국노동자대회 조직을 위한 집체극 꽃다지공연이 7개 지역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노동법 개정 투쟁 실천대도 구성해 활동했다. 그런데 정작 전국노동자대회는 힘을 갖지 못했고 농성은 취소되었다.

전야제 장소가 술장사들 판이네.” “새벽3시까지 전야제를 하고 다음날 6시간이나 걸었다.”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는다.” 등 전야제부터 행진, 대회까지 참가자들의 불만이 많았다. 이 대회 전야제는 그동안 열린 대회와 달리 장소가 공개되었는데 술과 먹을 것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먼저 진을 쳤고 노동자대회 사상 처음으로 질서유지대를 구성했지만 질서를 잡지 못했다. 일요일 아침, 고려대에서 효창운동장까지 시민들도 거의 없는 길로 걸었다. 대회장은 체육시설이라 본대오가 앉은 자리와 무대 거리가 너무 멀어 연사들의 말이 전달되지 않았다. 이런 조짐은 대회 준비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선전물이 늦게 만들어져 사전 조직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실제 참여인원이 예년에 비해 저조했다. 대회 이후 배치된 단위노조대표자 농성은 인원이 많지 않아 취소하고 말았다. 그래도 대전, 천안, 목포, 광양, 제주 등 지노협이 없는 지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1993년 전국노동자대회 준비를 잘 못했다는 평가로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노조 운동진영이 전노대로 결집했지만 그 결합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전노대와 노동운동진영 재편의 시작

ILO공대위는 199210전국노동자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 민주노조 총단결을 통한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 ILO공대위 강화와 발전이라는 기조 속에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우그룹노조, 풍산노조, 노동단체 대표 등 총 45명이 참석하는 대회 조직위원회 수련회를 개최하여 노조운동의 당면한 제 과제를 공동 수행하기 위한 공동사업 추진체를 확대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우자동차노조, 대우조선노조, 풍산금속노조 대표로 위임위원회를 구성해 ILO공대위를 확대·강화할 것인가, 새로운 틀을 만들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 결과 노동법 개정, 전노협과 업종회의에 제한된 ILO공대위를 넘어 새로운 공동사업 추진체를 만든다는 합의문을 작성했다. 199361일 출범한 전노대는 민주노조 운동진영의 공동사업 추진체로서 한국노총 전선을 명확히 했고 산업별·업종별 조직 건설의 토대를 확보했으며, 그룹 형태로 있던 대공장 노조를 사업과 조직의 책임주체로 나서게 한 것에 의의가 있었다.

전노대는 민주노조 운동진영에 몇 가지 문제를 던졌다. 우선 조직 위상 문제다. 전노대는 공동사업 추진체임을 확인하고 출발했지만 현실 작동은 달랐다. 민주노조 운동진영이 추진한 민주노조 총단결의 본체였다. 여기서 전노협과 전노대의 조직적 위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전노협은 강령에 자주적인 산업별 조직에 근거한 전국 중앙조직을 지향한다.”는 점을 밝혔고 이에 따라 조직대상을 전 산업 노동자로 두었다. 이는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전노대의 조직목표, 대상과 같았다. “전노협을 강화하면서도 전노대를 강화한다.”는 관계 정리는 애매했고 혼란을 야기했다. 민주노조 총단결의 성과가 확산될수록 이를 주도해온 전노협은 조직 진로를 둘러싼 입장 변화를 안팎으로 요구받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노동운동단체의 결합력과 방식의 변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ILO공대위의 주체였던 단체들은 전노대 출범으로, 민주노조의 확장과 홀로서기라는 발전적 현상 이면에서 정치적 노동운동의 개입과 실천과제 변화를 요구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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