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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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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내팽개친 정부가 초래한

 위험의 외주화

 

이종술광주전남

 


청년비정규직 김용균 동지의 처참한 죽음 이후 위험의 외주화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2010년 이래 8년간 총 12명이 일하다 사망했는데 이들 전부 하청노동자였다. 그동안 안전불감증 문제로만 치부돼왔던 발전소 중대재해의 근본 원인에 정부의 무분별한 민영화·외주화 정책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이론의 여지는 없다.

그렇다면, 발전소 민영화는 언제부터 어떻게 추진돼 왔을까.

 

효율성 제고 명분으로 시작된 발전 민영화

재앙의 시작은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 초기인 1993년부터 전력산업 민영화의 타당성과 현실성을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이렇다 할 만한 진척은 당시 없었다. 이어, IMF경제위기가 발발한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가 전력산업 구조개편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으로 민영화에 착수했다. 바야흐로 전력산업의 효율성 제고와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의 보장,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전력산업 민영화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정부 계획은 2001년에 이르러 구체화되었다. 기존의 한국전력공사 발전부문이 발전5(남부, 남동, 서부, 중부, 동서발전사)와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으로 자회사 분리되었고, 전력거래소가 설치·운영되었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전력산업에 대한 구조개편 뿐만 아니라 한국통신, 담배인삼공사,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 등 주요 공기업에 대한 매각도 강행했다. 바야흐로 공공부문 전 영역에 걸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관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20022월 발전·철도·가스 노동조합은 정부의 공공부문 민영화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 공공3사 공동파업으로 시작한 발전산업노조의 38일 파업 투쟁은 정부의 불법파업 엄단민영화 정책 강행입장 표명 이후 극렬한 탄압에 부딪혀야 했다(이 때 발전산업노조는 구속수배자 24, 고소고발자 894, 해고자 343, 조합비 가압류 62.3억 원 등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정부와 사측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2002년 발전산업노조 파업 투쟁은 일방적으로 추진되던 민영화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당시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부의 발전산업 민영화 정책을 백지화하지는 못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에도 역대 정권은 발전소를 비롯한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민영화를 호시탐탐 노렸다. 전 국민적 반대 여론과 노동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2002년 발전 파업을 통해 여실히 확인했던 노무현 정부는 이제 직접적인 분할·매각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민영화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탈바꿈했다. 요컨대, 발전부문 자회사들을 당장 민영화하지 않는 대신 민영화에 준하는 강도 높은 경영효율화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이유로 민간발전사를 점차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2009년에는 발전소 정비업무에도 경쟁체제 도입이 확정됐다. 공기업인 한전KPS가 도맡아 하던 정비업무를 6개 민간업체에도 일부 물량을 분담하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전KPS100% 담당하던 정비업무는 2017년 기준 46.8%까지 줄었다. , 민간업체의 점유율은 53.2%까지 치솟은 것이다.

 

발전5사에서 급증한 간접고용 노동자

이처럼 전력산업의 경쟁효율을 들먹이는 역대 정부의 행보는 대동소이하다. 그 과정에서 공공성이 우선되어야 할 전력산업은 자본의 비용 절감과 수익 창출을 위한 노름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 역시 역대 정부의 정책기조를 계승하고 있다. ‘공공부문 정규직화대책 발표 이후 운전·정비업무에 대한 시장개방정책을 잠시 중단했을 뿐, 김용균 동지의 죽음 이후에도 직접고용 정규직전환을 통한 공공성 강화 의지를 내비치지 않고 있다.

주요 에너지 공기업 중 발전5사의 간접고용 노동자 비율은 가장 높은 무려 40%를 육박하고 있으며, 한국수력원자력 역시 35%를 넘어서고 있다(아래 표 참조). 특히, 김용균 동지와 같은 발전소 정비업무를 담당하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100시간에 달하는 연장근무, 만연한 체불임금, 고질적인 산재은폐 등 전근대적인 노동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경쟁체제 도입과 효율성 제고라는 미명하에 발전5사는 야금야금 축나고 말았고, 주지하듯 그 결과는 위험의 외주화로 이어졌다. 지난 20여 년간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한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민영화·외주화 정책의 결말은 이렇듯 황폐하다


 79-특집_발전산업 외주화-민영화 실태.jpg

[출처: 발전5사 정규직 전환 컨설팅 최종보고서]


 

* 전력산업 구조개편 기본계획의 주요 내용은 한국전력공사 의 분할 후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전력산업을 민영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 이영면(2002). 발전노조의 파업과 시사점. 조정과 심판, 10, 3p.

*** 당시 한국노총 산하였던 철도노조와 가스노조는 자신들의 현안이 타결되자 공동투쟁 전선에서 발 빠르게 철수했고, 이후 발전노조는 역사적인 38일 간의 총파업을 진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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