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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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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11.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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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다

지금, 강간죄 개정논의에 힘을 보태자!


지수┃사회운동위원회



피해자가 피해 도중 ‘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으므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간음하였다고 보이나,

사건 당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정도를 넘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해당하는 유형력을 행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 광주지법 2014.12.10., 2014고합278. 무죄선고 판결


미투 운동 이후 208개 여성사회단체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출범해 ‘폭행 또는 협박’을 조건으로 한 현행 강간죄 성립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폭행과 협박’을 수반하지 않아도 충분히 위력을 가할 수 있는 가해자와의 상황을 고려해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에서도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변경하거나 ‘비동의 간음죄’를 별도로 신설하는 9개의 형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법사위에서 아직 논의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강간당했음을 증명하라’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성범죄를 규정한 법은 32장 “정조에 관한 죄”였다. 순결과 정조를 강요했던 가부장적 인식에서 출발한 해당 법조항은 1995년 제목만 “강간과 추행의 죄”로 변했을 뿐, 법의 실질적 내용인 ‘강간죄의 구성 요건'은 66년째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현재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수사‧재판 과정에서는 상대방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수준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음을 입증해야 강간죄가 성립한다. 피해자가 죽을힘을 다해 항거했음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가해자의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프다며 밀어냈어도 폭행‧협박으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 “적극적으로 반항한 흔적과 구조요청을 찾아볼 수 없다.” “6개월간 피해가 지속됐지만, 적극적으로 저항한 증거가 없다.” “상대방의 몸을 누르거나 팔을 잡는 행위는 폭행으로 볼 수 없다.” 법이 성폭력의 범위를 좁게 인정하는 동안,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간음’했다는 것을 증명해도 가해자들은 무죄선고나 집행유예를 받고 당당히 법원을 걸어 나왔다. 이러한 판결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이나 무고 등으로 역고소하겠다는 위협의 바탕이 되고 있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성폭력’으로 규정된 ‘준강간’죄 역시 법원은 술에 취하거나 잠이 든 경우 등을 ‘심신상실’로 판단하지 않는다. ‘의사를 형성하거나 표시할 수 없는 상황’ ‘장애가 있음을 이용하는 경우’ 등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준강간죄 역시 ‘동의 여부’가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함은 더욱 자명하다. 또한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에서 확인했듯이 폭행이나 협박을 따지지 않도록 규정된 ‘업무상 위력의 간음’에 대해서도 법원은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하며 또 다른 구성요건을 추가해 처벌의 공백을 더욱 넓혔다.



가해자에게 “어떻게 동의를 구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전국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실제 강간 상담 사례를 보면,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사례가 71.4%에 달하고,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행사된 성폭력 피해사례는 28.6%에 불과하다. 상습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혹은 의료인이나 낯선 여행지에서 가이드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 등 피해자가 벗어나기 어렵고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저항을 포기한 경우, 또 피해자가 잠든 상황이나 술 또는 약물에 취한 상태일 때, 피해자의 거부 의사에도 기습적으로 발생한 성폭력 등 피해자를 속이거나 피해자가 신체적·정신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이용한 경우 모두 강간죄·준강간죄의 법적 처벌 공백이 발생한다.


이미 독일·스웨덴·영국·캐나다·호주·아일랜드·미국(11개 주) 등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동의’ 또는 ‘적극적 동의’ 여부를 성폭력의 구성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동의의 자발성을 판단할 때 가해자의 폭행 및 협박뿐 아니라, 피해자가 ‘무의식, 수면, 공포, 음주, 약물, 질병, 상해, 심신미약’ 등으로 특별히 ‘취약한 상황’에 있음을 가해자가 이용했을 경우, 가해자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했을 경우에는 ‘자발적이라 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캐나다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의를 확인하기 위해 합리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 승낙의 항변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강간죄는 ‘동의’ 여부에 초점을 둔 구성요건으로 개정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어떻게 동의를 구했는가’, ‘무엇을 근거로 동의 여부를 판단했는가’를 질문하도록 형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성폭력은 여성과 남성의 성 역할을 가르고 성차별적 제도와 인식을 통해 성별 권력을 쥐여준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성폭력의 원인은 성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대를 꿈꾸는 우리,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우리가 나서자. 성폭력 피해의 고통에 더해 법정에서조차 피해자가 증명의 무게를 홀로 지지 않게, ‘동의’ 여부로 강간죄를 개정해나가는 싸움에 우리가 함께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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